모든 것이 순조로워 늘 기쁨과 행복을 즐기는 삶에는, 풍성하게 느끼는 감각 기능만 있으면 완전한 인생이 될 수 있겠지요.
평화로운 순간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 성가신 일들을 떨쳐버리고 행복을 방해하는 것을 물리치고 필요한 경제력을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만 있어도 멋진 삶을 즐길 수 있지요.
고통에 지쳐있는 어떤 사람에게 시련이 또 다시 겹치는, 겉보기에도 심술 굳은 운명의 냉혹함이 실제로는, 미숙한 개인성이라는 물렁한 쇠를 진정한 특성을 지니는 단단한 쇠로 변질시키는, 담금질의 불길이 될 수도 있다. [118:10.9]
The apparent cruelty of a perverse fate that heaps tribulation upon some suffering mortal may in reality be the tempering fire that is transmuting the soft iron of immature personality into the tempered steel of real character.
시련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게 되는데,행복을 지키거나 즐기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감각을 단련시키는 것이지 개인성을 단련시키는 시련의 극복이 아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의 그런 동물적 동기에서 행동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인도하는 길, 곧 실질적 가치를 찾아내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사랑을 즐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련을 당하면서 하는 행동이, 그 동기가 내 마음을 위한 것인지, 참된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인지, 무엇이 가장 최선인지 올바른 방향을 살펴야, 개인성의 단련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마음이나 감각의 단련만 되다가 말겠지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의식 깊숙이 배어 있어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여전히 깨달음에만 머물고 결심만 하고 있으니, 언제쯤 진리를 실천하게 될지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글을 살펴보면서, 시련과 고통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