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에서 상처를 받은 심신을 회복하려고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것은, 희로애락에서 벗어날 지혜를 얻으려 헤매는 것과는 좀 다르겠지요. 진리를 갈망하는 모습이 같다보니, 자기 자신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적 존재들이 행동을 보지 않고 동기를 본다는 말은,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을, 흔히 무영이라 합니다. 밝음이 없어서 참된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흔히 세상의 혼란과 갈등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충돌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빛은 실체로서 존재하지만, 밝지 않은 상태가 어두운 것이라서, 어두움이 별도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악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 빛과 그림자와 같은 관계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빛이 희미하여 온전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어두움이자 악한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을 빛이 없는 상태, 곧 무영이라고 말합니다. 궁극의 빛 곧 신성한 지혜가 다가오면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무영에서 살고 있으며, 빛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윤회와 연기설로 해석합니다만, 그건 무명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빛이 희미한 이유와 배경을 아무리 밝혀내도, 빛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두움이 마치 우리를 괴롭히는 실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더 어두움 속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밝음을 추구해야할 사람이, 정반대로 어둠을 거둬내겠다고 열정을 불태운다면, 그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스스로의 의미로 끝없는 어둠의 세상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영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나 의식에서나 밝음을 찾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명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시야가 지극히 어둡기 때문이지 세상에서 빛이 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야에서 바라보는 일체는 원래부터 있었고, 영원히 변치 않고 저절로 있습니다. 마치 우주아버지의 신성이 그러하듯이 그런 것이지요.
갓난아이 때 우리의 시야는 1 센티도 안 되었을 겁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가 성장하면서 점점 시야가 넓어지고 밝아지는 것이지요. 그처럼 참된 진리가 우주 공간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 의식 성장일 것입니다.
신성한 지혜, 반야에서 본다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실체치고, 머무름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참된 실체는 무주, 곧 그 어떤 곳에서도 머무름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요.
인간은 시공간 의식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무주의 실체를 사실로 받아들일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를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진리를 믿고 궁극에는 근원적인 빛을 만나려면, 그 작은 빛의 조각으로 이 세상에서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어두움을 괴로워하고 어두움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한, 빛의 세상으로는 한걸음도 나올 수 없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악을 제거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한, 선한 세상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습니다.
빛 안에서 찬란한 실체를 발견하고, 진리 안에서 신성하고 아름다운 선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진리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진리도 한낱 지적 유희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