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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단지 우리를 힘든 삶에서 위로해 주고, 평온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유란시아 책은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렇게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고통을 잊게 하거나 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종교와 유란시아가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많이 있겠지만 진리나 종교의 역할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닐까 봅니다.
유란시아에서는 일상에서 아무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재앙이라고 할 정도로, 삶의 고난을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마주하며 성장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종교의 본질이 바뀌는 셈이지요.
행복이나 자기만족을 채울 욕심으로 하느님의 힘을 원하고 의탁하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도 아니고 또한 마음껏 고난을 헤쳐 나가라는 하느님의 진리와도 맞질 않습니다. 그런 기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194:3.2 |
인간 일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이해하기 힘들고, 이것이 진리가 우세하고 정의(正義)가 승리하는 그러한 우주라는 관념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너무나 자주 중상, 거짓말, 부정, 그리고 불의─죄─가 득세하는 것이 나타난다. 신앙이, 결국에는, 악과 죄와 사악함을 이기게 될까? 그렇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일생과 죽음이 선(善)의 진리와, 영으로 인도 받는 창조체의 신앙이 항상 정당화된다는 영원한 증명이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하느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시는지 보자.”라고 말하며 조롱하였다. 십자가형의 그날은 암울하였지만, 부활의 아침에는 영화롭게 빛났다; 오순절에는 여전히 더욱 빛나고 그리고 더욱 기쁨 넘치는 날이었다. 비관론적인 절망의 종교들은 일생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그들은 끝없는 수면과 휴식 안에서 절멸되기를 갈망한다. 이것들은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의 종교이다. 예수의 종교는 분투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하여 선포되는 신앙의 새 복음이다. 새로운 이 종교는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 위에 세워진다. | 이 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생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은 절망의 종교이고 그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려는 갈망은 새로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고통과 갈등은, 악과 죄를 행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기 때문인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결국에는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 말을 믿기가 힘들다면, 새로운 복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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