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성과 개인 - 불변성과 가변성   13-06-15
불새   573
 

유란시아 책에서 나오는 개념을 개인의 시각으로 정의하는 일은 극히 조심스럽다..

옳은 번역이나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거나 나름대로 정리하는 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만, 개인성과 같은 개념적 논쟁은 전적으로 무익하고 오히려 유란시아 진리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 개인성(personality)과 개인(person)은 유란시아 책에서 하느님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용어이다. 이렇게 중요한데도 유란시아 책의 저자들이 자신들도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의미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정의될 수 없음에도 핵심 주제로 수없이 나오는 이유는, 천상의 존재들은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고, 이와 연관되는 개인도 또한 당연하게 뚜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저자들이 이들 단어의 차이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혼란스럽고 다투기 좋아하는 인간의 능력과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저자들이, 왜 이 핵심 단어의 관계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않는지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고 본다. 두 가지 관점에서 먼저 그 이유를 추측해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첫째는 영어 personality(개인성)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person(개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의 연관성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 기초적인 개념이라서,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이유라면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person이 어간이 되는 말을 찾아서 사용하고, 이 어간에서 파생되는 말로서 personality를 번역하면, 저자들의 생각처럼 굳이 personality와 person의 관계성을 일일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

둘째는 개인성은 정의될 수 없지만 영적 성장에 따라서 이것을 실체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설명이 있듯이, 개인과의 관계도 인간 각자가 달성하는 다양한 영적 성취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것이 자유로운 영적 성장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천상의 존재들이 의도적인 설명을 피하는 경우이다. 만약 이런 이유라면 섣불리 나서서 개인성과 개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삼가야 마땅하다. 문장이 왜곡 되었을 때, 이견을 말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전체적으로 개념을 제시하거나 정리한다는 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도움은커녕 하찮은 인간 지식으로 숭고한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될 수도 있다.

유란시아에서 제시하는 개인성은 우주아버지의 사랑과 직결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믿음의 종교에서 평안을 얻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종교를 제시하며 강요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경고를 미루어 볼 때, 천상의 존재들이 종교적으로 사랑의 진리가 담겨있을 개인성과 개인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피해야만 하는 아주 조심스러운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개인성과 개인이 불가분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개인성과 개인도 하느님과 신처럼 글을 읽어가면서 개념적으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 삼가야 할 점이 있기 때문에, 개인성과 개인에 대한 각자의 개념적 발전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실적인 관점과 철학적 개념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중요한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를 정의하려고 신도 등장하고 만물의 근원도 등장시키면서 추론 가능한 모든 원인과 실상과 미래적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에서 존재의 본질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유란시아 글에서의 개인성이다. '존재'는 통칭하는 일반 용어이지만, 개인성은 각각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마주본다는 차이만 있다.

유란시아의 개인성, 철학의 존재와 연관되는 많은 용어들이 모두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를 제대로 알아야만 올바른 개념을 지닐 수 있다. 철학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존재, 현존, 실체, 실재, 감각, 직관, 본능, 마음, 의식, 의지, 지능과 같은 비슷비슷한 단어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념으로 제시되는 이유가 모두, 존재와 그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지혜를 탐구하고 진리를 찾는 철학자에게 이들 용어를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필수 과정이다

유란시아 책을 이해하는데 이들 철학적 개념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책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인간이 달성한 최고의 개념을 기준하며, 그 바탕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용어에 무지하다고 해서, 책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상의 존재들이 전하는 말을 온존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개념은 필요할 것이다. 

일반 독자들은 철학적 개념이나 의미를 몰라도 된다. 읽어가면서 저절로 이들 기초 개념이 정리되고 의미가 파악되도록 글이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이미 기초가 되어있는 철학적 개념을 새삼스럽게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별도로 수고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원본의 의미를 그대로 전해야 하는 번역은 유란시아를 완독한 후, 철학적 고뇌를 충분히 거친 후에야 가능하리라 본다.

개인성과 개인은 철학에서나 유란시아 책에서나 모든 질문의 시작이자 결론이 되는 개념이다. 실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개념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잠재적이든 실재적이든 개념은 곧 실체이다. 철학자의 고민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의하는 문제와 그 근원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개인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이 필요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개인이나 개인이 체험하는 우주만물은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변화하는 존재가 가능한 원인이자 근원은 변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

어제와 다르게 존재한다는 사실, 시간과 공간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느낌을 느끼면서 변화되는 존재, 흐르는 강물에 같은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영원히 변화를 겪는 존재가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개인이다. 물론 사람이라고 통칭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모든 존재가 같다는 의미라서, 저마다 다른 존재를 의미하는 개인이 궁극적 질문의 본질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라는 통칭은 생물학적 기능 존재로서의 의미에 갇힐 수 있다. 인간이나 사람을 나타내는 human, man 대신에 person과 personality가 현실을 살아가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유란시아 책에 등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현실의 무대에서 수많은 존재자로 존재하는 현상이 현존이고, 그 현존의 주인공, 곧 존재하는 각자가 개인(person) 이다. 그리고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되는 참된 실체가 개인성 (personality)이다.

존재자를 개인이라고 한다면, 이 존재의 사실과 관련된 원인적, 근원적, 결과적, 초월적 의미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유란시아에서 말하는 개인성 (personality)이다. 개인(person)은 논쟁이 필요 없는 사실이지만, 개인성(personality)은 수많은 논쟁으로도 만족할만한 답을 구할 수 없는 초월적 개념이자 실체이다. 개인은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성은 존재한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두개의 단어는 분리될 수도 없고, 분리된다면 결코 서로 존재할 수가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철학에서 person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환경에 따라서 끝없이 부침을 겪는다. 성장하고 늙는다. 그러나 personality는 변화하는 개인이 지닌 모든 것의 근원이자 시공간의 초월적 속성을 나타내는 통합된 실체적 개념이라서 변할 수 없다. 의식이나 직관이나 현존에 따라서 희미했던 개인성이 점점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시공간에서도 변하지 않는 초월적 개념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차원적 개념이다. 더구나 유란시아 책에서는 본질적으로 절대적 불변성을 기반으로 탄생되었다는, 그러한 바탕 위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개념이다. 이에 반하여 개인은 철저하게 시간과 공간의 차원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실적이고 차원적 개념이다. 따라서 개인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변성을 전제로 하는 "현존"에서의 실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개인은 어떤 차원에서 현존하고 있던지, 그 차원의 삶의 여건에 따라 변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면 영원히 변하고 무한한 존재라면 무한히 변하는 실체이다. 절대 차원에서는 절대적으로 변화하며 현존하는 실체이다. 그래서 개인이라는 말이 사용되면, 그것은 언제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차원이 유란시아 같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이건, 하보나와 같은 완전의 차원이건, 최극, 궁극 혹은 절대 차원이건 반드시 그 차원에 국한되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반하여 개인성은 차원과 관계없이, 전혀 별개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주아버지가 개인성으로 표현될 경우에는, 시공간 차원이나 절대차원이나 차원과 관계없는 의미에서의 우주아버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주아버지가 개인성이 아니라, 개인으로 지칭되는 문장이 있다면 그 문장은, 그것이 절대차원이건, 궁극차원이건 시공간 차원이건, 반드시 그 차원에 국한된 우주아버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은 어떤 차원이건 존재하는 사실, 즉 존재자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개인성은 존재자가 아니라, 차원과 관계없는 존재, 그 존재성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개인성을 이해하고 서로 논증하고 체험적인 실체라고 서로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차원과 관계없는 개인성을 차원적 존재가 개념으로 기술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다. 개인성의 근원이신 우주아버지 외에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저자들의 설명이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고 있다

개인성과 개인이 나란히 동원되는 문장에서도, 개인성은 그 차원과 상관없는 개념으로, 그리고 개인은 그 차원에서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차이만 알고 있다면, 그 어떤 문장에서도 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존재성(존재의 근원)과 존재자의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어서, 약간의 주의만 기울여도 누구나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혼동되지 않는다.

현재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는 유란시아 번역본을 보면, 영어 personality를 개인성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성격이나 인격이나 또는 존재성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표현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불변성을 나타내는 무차원적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이와 직결되는 person이 영원한 가변성을 나타내는 차원적 사실이라는 점만 유지한다면 영어 원본의 본래 의미는 잘 전달될 수 있다. person을 어간으로만 한다면, 그것이 성격과 성격자, 혹은 인격과 인격체 혹은 존재성과 존재자로 번역하는 것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성격이 성격자로 뒤바뀌거나, 인격과 인격체가 뒤바뀌면, 불변성 개념이 가변성 사실로 왜곡되어 어처구니없는 해괴한 의미로 변질될 것이다. 더구나 personality를 무차원의 개념으로 번역되다가, 같은 단어가 차원적 존재인 성격자나 인격체로 번역된다는 것은 엄청난 왜곡이다. 철학적 소양을 조금만 갖추어도 피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철학을 모른다 해도, 유란시아 책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치명적 오류이다. 철학적 개념이 완벽하게 정리된 글이 4부의 161편이다.

글 161편을 보면, 로단이 제자들과 이견을 보였던 내용이 개인과 개인성에 관한 해석이며 개인과 개인성에 대한 관계가 간접적이나마 제시되고 있다. 하느님의 개인성과 개인의 문제에 고민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단순히 하느님의 본성이나 속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포함하여 우주 만물의 존재와 근원에 관한 내용으로 확장될 수 있는 깊은 내용이며 모든 철학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유란시아에서도 비중 있게 그 당시의 고민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들이 만약 유란시아의 글 160 편을 같이 읽는다면, 중.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철학적 논제가 2000년 전의 한 철학자가 깨달았던 지혜에서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불변성의 personality, 곧 개인성이 우주아버지의 선물임을 확신하는 것이 유란시아 책의 핵심이며, 구원의 신앙으로 이끄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개인성으로서의 우주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불변적 개인성에 대한 깨달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인성 대 개인성으로는 아버지와 자녀의 신분이 될 수 있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하느님과 동물에 다름없다. 엄청난 차원의 간격이 있다. 개인성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하느님을 이해하고 있는 한, 유란시아 책은 영적 진리를 계시하는 책이 아니라 지적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책이 될 수도 있다.

개인성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거나 그 안에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느님은 개인성이시다."이라는 말이 개인성이 시공간에서 벗어나는 개념의 바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주의 모든 개인성이 우주 아버지로부터의 증여이며 모든 것이 변해도. 개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에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참된 실체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의 개인성이 우주적 진보와 섭리적 운명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성의 관계를 직접 비교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부적인 차이점은 독자들의 자유로운 체험으로 점점 밝혀져야만 할 것이다.

다만 개인성과 개인은, 이 말이 나란히 등장하는 문장은 물론, 모든 글에서 시간-공간 넘는 존재적 개념과, 시간-공간의 영역에서 제시되는 사실적 체험적 실체라는 개념으로 뚜렷하게 일관성 있게 구별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혼란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기에, 기본적인 차이점은 확실하게 논의해 보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강조한다면, 낙원천국과 같은 절대적 차원이건 혹은 영원-무한의 최극의 차원이건 또는 완전의 차원이건 상관없이, 개인성은 변함이 없지만 개인은 반드시 그 차원에 종속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나 신이나 개인성과 연관된 설명에서는 차원에 한정되지 않지만, 개인(person)이나 개인적(personal)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반드시 특정한 차원으로 한정하고 있다.

차원에 한정된다는 말은 차원이 바뀌면 개인은 새롭게 바뀐다는 의미이다. 개인은 시간공간의 차원, 주어진 환경에서 끊임없이 변하지만 개인성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개인성이 변하면,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그 실체의 존재적 의미나 가치가 정의될 수가 없다. 결국 그 어떤 체험적 성취도 누구의 소유인지 특징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며 우주에서의 모든 의미와 가치의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성의 불변성은 필연적이고, 진리의 핵이며 우주아버지가 실체임이 증명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끝으로 개인성과 개인의 차이를 보여주는 책 앞 부분의 글을 소개하며, 개인성의 불변성과 개인의 가변성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8:6.2

무한 영은 하나의 완벽하고 완전한 개인성, 우주 아버지영원 아들의 신성한 동일 존재 그리고 합동 존재이다. 공동창조주아버지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주들의 좀 더 높은 지능존재들에게는 실제이며 눈에 보이고; 정말로 그 이상인데, 이는 모든 상승자들이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기 전에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 이기 때문이다.

8:6.3

무한 영, 신(神)의 셋째 개인 너희가 개인성과 연합하는 모든 속성들을 소유하게 된다. 은 절대 마음을 자질부여 받고 있다: “은 모든 것들, 심지어는 하느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한다.” 은 마음뿐만 아니라 의지도 부여받았다. 자신의 선물을 증여함에 있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일들은 하나이고 아주 똑같은 이며, 모든 사람에게 따로따로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로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이다.”


8:6.2 에서 무한 영을 완전한 개인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영원 아들을 절대적 개인성으로 표현한 앞 편의 글과 개념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이때의 개인성은 철저하게 무차원적으로 이해해야만. 이 완전한 개인성 때문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다음 문장의 진리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해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수사적 문장으로 지나치게 될 것이다.

8:6.3에서는 개인과 개인성이 나란히 등장한다. 우리가 무차원적인 개인성(개인이 아니다)으로 연합될 수 있는 것이, 무한 영의 개인(개인성이 아니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주 현존의 실질적 현상이 무한 영의 현존으로 인한 것이며, 이 현존 현상은 역으로, 무한 영의 등장이 필연적이라는 의미와도 연결된다.

무차원적인 개인성 연합에는 우주아버지도 포함되며, 창조주 아들도 포함된다. 개인과 개인의 연합이 아니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한 영의 개인이 지역우주 어머니, 성령의 본체라는 사실과 이어지고 있다. 이 문장에서 하느님을 처음 만나는 칠중의 접근에서 창조주 아들의 개인성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 성취가 무한 영의 현신인 지역우주 어머니 영의 개인적 현존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의 의미는 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끊임없이 확대되는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모두 개인성과 개인의 불변성 가변성을 올바르기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또한 가능하다.

지루한 글이라서 읽는 분에게 불편하겠지만, 개인성과 개인을 뚜렷하게 구별함으로서 얻는 영적 진리가 단 하나라도 있을 수만 있다면, 지루함은 충분히 보상되리라 기대한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7-13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김경덕 13-06-15
 
훌륭한 글 잘 보았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개인성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이 행성에 탄생하기도 훠얼씬 이전
수천억 수조년의 시간 보다도 더 길고 온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이 시작되기도 그 이전
모든 것의 orogin이신 universal father의 전체이자 일부로서 잠재되어 있던 실체,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의 본성의 활방을 구했던 모든 현자들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이자 근본이며 사람 안에 잠재하여 있는
전 우주 창생의 기본이 되는 그 신비하고 오묘하기 그지 없는
그래서 언어로 형언하기 힘든 실체에 대해 각기 다른 말로 통칭하였던 것이지요.

사람 안에 내주하고 있는 우주 아버지의 또 하나의 증여인 사고 조절자는 그 개인성이
현생에서 각성되고 확장되어 영원불멸의 삶을 향한 준비를 해 나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고 있는
조력자라고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개인성 personality 라고 하는 개념은 그 명명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을
담고 있기에 그 개념을 해오 하기가 사람의 지성을 동원하여 해결하기에 매우 벅찬 부분이지요.
유책에서 나와 있는 개인성에 대한 설명이 그 자체로 흡족하진 않지만 개인성 이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의
성품 본성 신성에 대한 접근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꼽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개인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그 증여의 주체이신 우주 아버지의 창조력을
그리고 그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한 치 없이 정교하게 유지되는 이 조화우주의 한 부분이자
상승하는 운명의 아들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곧 유한과 불완전의 삶 속에서 무한과 영원 불멸
을 향한 신성합일의 길을 선택하는 놀라운 사건인 것 입니다.

저도 161편을 매우 뜻 깊게 보았는데 오늘 한 번 다시 보아야 겠네요. 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코너킥 13-06-16
 
개인성이 불변이라는 말은, 차원을 관통하는 상승의 운명에서 변치 않는 참 실체라는 정도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차원과 관계없다는 말씀에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공감이 갑니다.

엄격하게 본다면 시공간 차원에서 불변성 실체는 존재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개인성을 부인하고 개인의 절대성만을 확신했던 영적 존재가 루시퍼입니다. 무차원의 개인성을 대신해서, 차원적 존재자인 개인이 그 자리에 들어와서 불변성의 진리를 외치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개념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받아들여 마음속에서 쌓인다면 결국에는 의식이 전환되어 루시퍼의 주장에 매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공간에서 살아도 영원무한의 불변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개인성을 개인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꼴라쥬 13-06-17
 
책을 읽으면서 일일이 실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개념을 만들때 중요한 차이점 같습니다. 개인성이 실체라는 이야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디오니스 13-06-18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사실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진리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란시아 책은 지금까지의 종교와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만 진리를 믿도록 밝히는 과정에서, 표현이나 설명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내용들로 가득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겠지요.

그러나 개인성에 대한 진리는 이제까지 제시된 적이 없는 것으로서 유란시아 책이 새로운 시대적 계시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핵심의 하나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과 신이 개념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고, 인류 진화의 모든 배경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이유를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이고요. 개인성의 개념이 제시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내주하는 생각조절자의 절대적 의미가 우주아버지의 사랑의 증거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유란시아 책을 모르는 분은 물론이고, 독자 중에도 개인성을 개인에게 속한 어떤 절대적이고 영원한 본질로 여기면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성이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이 개인성에 속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말하자면 개인성이 실체이고 개인이 그 실체의 그림자인데 그림자가 그 안에 실체를 담을 수는 없지요. 이런 개념적 착각은 아마도 개인성을 성격이나 인격처럼 인간이 지닌 속성이나 본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개인성을 개인에 속한 것으로 여기면 그 절대성을 중시하려는 시도로 모든 것을 팽개치게 될 것이고, 이는 현실을 점점 사소하게 여기게 만들고, 결국에는 현실을 초월하는 어떤 경지를 체득하고자 삶의 목표를 정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자아의식에서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여기면서 만들어 낸 개념은, 모론시아 차원도 아닌 곳에서는,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어도 불변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개인에게 속한 것은 개인이 사라지면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하는 것은 개인성이지 개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개인성은 개인이 사라져도 죽지 않고 남아 있을, 혼과 같은 결과물도 아니고, 무조건 남아있을 선천적인 원인도 아닙니다. 사라질 수도 있는 실체입니다.

인간의 소유한 것은 자유 의지 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성, 속성. 감각, 마음. 지능과 같은 개인에게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에너지나 중력과 마찬가지로, 비롯되는 우주 근원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합하여 존재적, 체험적 실체로 이루어가는 것이 개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성은 김경덕님 말씀처럼 '언어로 형언하기 힘든 실체"이며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 되는 것이지요. 개인성은 우주를 관통하면서 존재할 "미래적 실체"이며, 개인은 개인성에서 비롯되어 통합을 이루고 있는 "현실적 그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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