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개념의 확장 - (Personality 관련)   11-10-24
불세출   718
 

관념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철학에서는, 인격과 인격체에 결코 혼용될 수 없는 현격한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는 글에 공감한 적이 있다. 철학보다 심오한 유란시아 책을 읽으면서 철학에서조차 엄격하게 구별하는 이들 개념을 아직도 대수롭지 않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 문제를 좀 다르게 조명해 볼까 한다.

개념의 무차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전 철학보다 후퇴하는 것이라서, 그런 상태로는 새 시대를 깨우는 진리를 깨우치기는 것이 거의 기적일 수도 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의 무지는 순수함이 넘치기에 가슴 설레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런 순진한 깨달음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의 대상이다. 그런 도전하는 사람은 자유를 즐기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순진한 마음이 자부심으로 오만하게 변질되고 변화와 성장을 거부할 때, 순진하고 순수한 깨달음은 구원의 빛이 아니라. 눈을 멀게 만드는 암흑의 관문으로 바뀌게 된다.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철학자의 처절한 과거의 고민을 이제와서 다시 그대로 반복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철학에서나 종교에서나 진리의 탐구가 존재와 존재자가 다를 수 있다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점은 잊지말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 개념조차 없다면, 유란시아 책을 스스로 이해하기 힘들고 남에게 권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인격, 인격체 혹은 성격, 성격체라는 한글 단어는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 오래 전부터 영어 personality와 person을 나타내는 한글로 번역하고 개념화하면서 사용되어온 바 있다. 일상의 대화에서, 지금 글을 읽는 당신이 인격인가 아니면 인격체인가, 혹은 성격인가 성격체인가 물었을 때, 이 두가지 단어가 같은 말이거나 질문 자체가 이상한 개념이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이 두 단어의 개념상의 차이는 분명하고, 일상적으로 구별되는 단어이다. 이러한 구별은 엄밀하게 개념을 다루는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란시아 책에서 등장하는 personality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personality에 대한 개념을 인격이나 성격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계속 하나의 단어로 그렇게 표현되어야만 마땅하다. 문맥에 따라서 인격체 혹은 성젹체로 바꾸어야만 한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개념이거나 개념을 표현할 한글을 몰랐었다는 중거가 될 뿐이다. 일상에서 조차 차별되는 단어 의미마저 확실한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러한 번역자의 무능력으로 personality가 person으로 개념이 바뀌거나 혼용된다면 유란시아 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사용되는 개인성과 개인이라는 표현이 최선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나마 차선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욱 적합한 표현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왜 이런 착각과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에 대한 무지인가? 지적 오만인가? 번역 기술상의 부부의한 자세일까? 아니면 올바른 개념을 착상하지 못한 혼란 때문일까? 여러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personality와 person을 저절로 또렷이 구분하는 미국인도 각각의 단어를 용도에 맞게 쓰면서도 막상 personality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한다. 그저 person을 구성하는 어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특성으로 막연하게 이해하는 정도이다. 그러다가 유란시아 글에서 새로운 personality 개념을 만나며 놀라는 사람이 많다. 쉽게 이해하지 못해서 당황하는 사람도 많지만, personality에 대한 개념상의 확장으로 놀라운 진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도 많다.

어찌되었건 person과 밀접한 어떤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정한 우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글을 만났으니 잠시 당황스럽지만 결국에는 심오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기쁨은 일상생활에서 서로 다른 개념을 모두 친숙하게 구분하며 사용해 왔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응한 한글의 인격이나 성격은 일상의 단어이기 보다는 논문에서나 쓰이는 학문적 용어라서, 우선 유란시아의 일상적인 개념과는 배경부터 차이가 많다. 그런 용어는 살아있는 일상의 용어를 철학 교실로 옮겨와 생명을 죽이는 일이며, 게다가 개념마저도 철학보다 흐릿해서 두서없이 혼용한다면 진리가 주는 진정한 기쁨을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재대로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왜 철학에서는 애초에 personality를 성격이라고 번역했으며, 신학에서는 인격이라고 번역을 했어야 했을까? 그것은 철학과 신학에서 제시하는 학문적인 의미의 영어 personality 개념이, 한글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따로 있다.

신학이나 철학이나 가장 오래된 진리의 개념으로 로고스가 있다.

성경은 누군가가 갑자기 지어낸 책이 아니다. 창조주의 창조 행위의 첫 번째가 바로 "말씀"이라고 전승되어 왔고, 그것이 성경으로 기록화 되었다고 봐야한다. 유란시아 책은, "말씀"이 기원적으로는 영원 아들에서 유래되었음을 설명하지만, 성경 기록이 개념적으로는 거의 옳다는 것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만약에 성경의 "말씀"이 유란시아 책의 개념과 같다고 한다면, 우주 아버지의 의지 행위를 나타내는 어떤 개념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후대로 어떻게 전승되어 왔을까 궁금해진다. 혹시라도 성경의 기록자가 그러한 개념을 알고는 있었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후대의 신학자들이 말씀의 원인이 되었던 최초의 생각, 의지행위를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지금까지 하느님 진리의 정점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유란시아 책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유일신 사상을 계승받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태초로부터 전승된 창조 행위의 진리를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꽃을 피웠다. 이들이 하느님없이 로고스 개념만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했던 루시퍼 측에 동조했던 인물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찌되었건 로고스 개념은 성경이 기록되던 당대의 인간이 지닐 수 있었던 진리에 대한 최고의 관념임에는 틀림없다.

예수의 가르침이 헬라 문명과 만나고, 특히 로마 철학의 진수를 알았던 바울이 제도화하면서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알고 있다. 하느님 없이 존재했던 로고스 개념이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 창조 행위의 핵심 진리도 둔갑되었으니, 이후의 신학이 철학과 영적 진리 사이에서 왜 그렇게 비틀거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로고스는 성경의 근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로고스 개념은 하느님을 부인했던 후손들의 진리에 대한 개념이었기에, 신학은 결코 그 안에서 서성거리면 안되는 것이다.

신학이 로고스 안에서 서성거린다면, personality 개념은 하느님을 제외시킨 철학자들이 달성한, 단지 로고스 안에서 존재하는, 그러한 최고의 개념에 도달할 뿐이다. 인격이라는 개념을 깊이 깨달을수록 로고스에 가까울 수는 있지만, 로고스를 뛰어넘는 인격은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지금 인격 혹은 성격이라고 번역되고 이해되는 철학적 개념의 전부이고 신학과 철학이 맞붙는 경계이다. 로고스 아래에서의 영어 personality 개념은 성격이나 인격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한계이기도 하다.

인격과 성격의 개념으로 로고스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로고스마저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이고 철학의 기본조차 생소한 사람일 것이다. 그야말로 철학자들이 비웃는, 대화가 불가능한 인격이 된다. 철학과 신학에서의 인격과 성격의 개념은 그 어떤 진리로 확장이 된다 해도, 우주 근원으로 여기는 로고스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학문적으로 용기있고 정직한 사람이다. 이 말의 진의를 모른다면, 유란시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탐구하고 이해하는 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철학적 진리는 그리스의 로고스 관념에서 유래되었고 그곳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주목해야만 한다.

하느님이 personality라는 사실은 유란시아 책의 첫 부분에서 선포되는 가장 핵심 주제이다. 유란시아의 personality는 로고스 안에서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고심 끝에 찾아낸 인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로고스를 만들어내는 원인적 존재성을 가리키는 놀라운 개념이며 로고스의 전제가 되는 개념이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개념의 상승인지 절실하게 느낄수 있어야 한다.

personality 와 person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면서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영어권 독자들은 이미 그러한 놀라운 의식과 깨달음의 상승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한글 인격과 인격체를 마구 혼용하거나, 성격과 성격체를 마구 섞어가며 허둥대면서 그러한 쇠락한 학문적 놀이에 빠져 유란시아 책을 읽고 싶지 않다면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로고스를 초월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하고 싶다면 성격이나 성격체를 포기해야하고, 인격이나 인격체를 버려야만 한다.

지혜의 최고봉을 성취한 현자들이 정의한 인격이나 성격은, 언어 자체가 지닌 한계성으로 인하여 그 현자들이 다시 살아나 유란시아의 의식을 받아들이고 확장한다해도, 결코 로고스의 벽은 넘을 수 없다. 그 개념을 사용하는 후대의 식자가 현자의 개념을 능가하겠다는 발상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며, 망상일 것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우주를 생성하는, 그처럼 전혀 새로운 로고스가 만들어지는 주체성이 새로운 운명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싶다면, 학문적으로 정직해야하고, 영적으로 자유로와야 한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유토피아 11-10-24
 
근본은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되었을텐데, 왜 그렇게 많은 학파와 종파가 생기는지요. 자기의 해석이 신성한 진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때문이겠지요.

오래 전에 요한복음 1장 5절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를 놓고 교리 논쟁이 있었는데, 원문대로 해석하면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and the darkness comprehended it not")  "빛이 어둠 안에서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빛과 어둠의 역할에 대하여 외부인지 내부인지 극심한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둠을 옹호하는 입장이 아주 논리정연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유란시아 책을 읽으면서 원문대로 "빛이 어둠 안에서 비취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요. 어둠의 기능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당황하게 만들었던 주장이 억지였다는 점도 지금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총을 바라는 구복신앙으로 교회에 나가는 분은 조금 실망될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슬기 11-10-25
 
빛은 어둠을 향해 비춘다고 알고 있었는데...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빛이 어둠 안에서 비친다는 요한복음은 처음 듣네요.  좀 놀랍기도 하고요. 잘못 말 꺼냈다가는 크게 오해받을 것 같아요.
꼴라쥬 11-10-26
 
좀 어렵기는 하지만 불세출님의 글에서 여러가지를 배웁니다. 인간의 속성과 한계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군요. 종교의 본질에 관한 글을 새로운 자세로 읽고 싶네요. 성경은 잘 모르지만, 요한복음에 있는 "빛이 어둠안에서 비친다"는 말이 사람 몸안에서 빛나는 생각조절자를 암시하는 말처럼 들리는데, 성경에 그런 말이 들어 있었다면 놀랍네요. 아마 예수님의 온전한 가르침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데, 뭔말인지 이해를 못했던 후인들이 엉망으로 만든것이겠지요. ㅠㅠ  영어는 안그런데, 한글만 그렇다니...그거 참. 차라리 의문으로 그냥 놔두었다면 누군가가 진리를 발견했을테지요.
코너킥 11-10-26
 
모르면 모르는대로 겸손할 줄 알아야지요. 불세출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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