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4)   11-05-17
E.T   1,443
 

관리자님께

지난번 올린 글에 디오니소스님이 보내신 댓글의 답을 쓰며 일부를 수정하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글 전체가 삭제되어 다시 지난번 글을 올립니다. 디오니소스님에게도 미안합니다. 지난번 댓글의 기록이 있으시면 다시 올려주십시요. 답신을 드리겠습니다.  

112편; “자아의 모든 개념들에서 삶의 현실이 우선이며, 삶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나중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아이(The human child)는 우선은 살고, 그 후에 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주의 理法(Cosmic economy)에서는 통찰이 예지보다 앞선다.”


앞의 2장에서 인용한 본문에
“진화하는 행성들은 인간 기원의 영역이며, 상승하는 필사자의 생애가 시작되는 세계이다. 유란시아는 너희의 출발점이다.”라는 기술처럼 낙원을 향한 영적진화의 출발점에 선 인간은 우주에서 첫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첫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는 인간에게 증여된 ‘Personality’가 가지고 있는 우주-實際의 진정한 의미를 처음부터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진화의 결과인 유기체의 삶을 유지하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체로서의 물질적 생존이 우선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어린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인지능력이 늘어나고 사물들의 실상을 하나씩 둘씩 깨쳐가듯이, 이렇게 출발한 인간은 의식이 진보하고 영적 감수성이 개발됨에 따라 주변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우주에 대한 의미, 가치, 통찰력이 성장하며, 이에 따라 개인의 인식-프레임이 확대되고, 영적수준이 향상되어 내재하는‘Personality’의 의미를 점차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게 되며, ‘Personality’의 발현으로 자아의 정체성과 인격이 점차적으로 고양됨에 따라 삶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이해가 뒤따르게 된다는 거지요.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
자아의 모든 개념들”이란 유기체인 ‘몸’을 자신의 자아로 생각하는 물질적 자아와, ‘Personality'의 발현으로 표현된 자아가 내적 인식의 성장으로 그 의미와 가치들도 확장되어 종국(終局)에는 神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자아 개념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영적진화의 출발선에 서있는 우주의 어린아이는 물질적 유기체인 ’몸‘의 생존이 우선이라는 것이지요. 앞에서 “삶은 정말로 유기체(자아)와 그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라는 본문을 살펴보았지만, 유기체의 물질적 삶은 주변 환경과의 연속적 반응이며, 이런 반응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에 밝은 생활의 예지(叡智)가 필요하지요. 1편에서 “사람의 물질적 육신은 神의 성전(聖殿)이다.”라고 했습니다. 神의 성전에 여름의 장맛비로 지붕이 새면 기와를 갈 줄 알아야 하고, 겨울 한파에 수돗물이 동파되면 계량기를 교체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弊家)가 되고, 요즈음 아파트 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듯이, 우주 이법(理法)의 관점에서는 물질적 유기체의 생존에 필요한 삶의 예지(叡智)보다는 내재하는 ‘Personality'에 대한 통찰과 탐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165편에서 예수님이 그의 사도들에게
“무엇을 먹을지 또는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지 하는 세속적 삶의 것들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마라. 혼의 복지가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영적인 진보가 의복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사도들에 대한 가르침도 일상적인 삶에서 ‘몸’이라는 유기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먹을지 또는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지”하는 육신의 일 보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혼의 복지”, “영적인 진보”라는 내적인 통찰과 탐구가 더 중요하는 것이지요.


요즈음은 어린아이가 철들기 시작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출세를 위해서 공부 그리고 시험성적이 최고의 화두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갖가지 압력을 받기 시작하고 이런 주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지금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사교육 열풍이겠지요. 이 단계가 지나면 유기체의 본능적 욕구인 재생산을 위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어 개인적,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며, 이런 일상의 삶 속에서 온갖 풍파와 역경을 헤쳐 나가야만 하기에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지난 삶을 돌아보니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누구인가?, ‘나’의 참-자아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과 내적 성찰을 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지금도 젊어서는 열심히 일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자식들이 출가해서 원만히 가정을 꾸리고 나면, 모든 것을 툴툴 털어버리고 수행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112편으로 돌아가서; “마음이 실재(實在)를 그것의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물질은 물질적 분별들로 사라지지만, 아직 마음에는 실재적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적 통찰력으로 물질이 사라진 후 마음에 남아 있는 그 實在를 추적하고 그것을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그것은 마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靈의 통찰력은 아직도 ‘영-본성의 우주 實在들과 최고 가치들’(Cosmic realities and supreme values of a spiritual nature)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우주의 어린아이인 사람이 실재(實在)라고 생각하고 있는 ‘몸’을 마음으로 궁극에까지 분석하고 추적해보면 사람의 ‘몸’은, 앞에서 살펴본 “인간의 유기체에서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합(合)이 자아─개체성-를 이룬다.”라는 기술처럼, 여러 물질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희(喜), 노(怒), 애(哀), 락(樂)과 같은 다양한 감성들과 사유(思惟), 인식(認識)과 같은 이성적인 것들이 어떤 실재적인 의미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실재적인 의미로 남아 있는 이런 것들을 영적 통찰력으로 다시 궁극에까지 추적해서 분석하면, 그것들에도 역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으며 단지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의 이 구절은 동물로부터 진화한 사람의 ‘몸’에 보조-靈들의 증여로 마음이 부여되고, 다시 靈들이 증여되어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구성된 우주의 질서에 따라 ‘몸’은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은 영적 통찰력으로 궁극에까지 추적해서 분석해보면 사람들이 실재(實在)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몸’과 마음의 작용인 감성과 이성들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말이나 글로서는 쉽지만, 이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을 궁극의 경지에까지 분석하고 추적해서 그것들에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범인(凡人)의 경계를 넘어서는 높은 경지이겠지요.

佛家의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茶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는 구절로 반야심경은 시작됩니다. “부처의 자비와 지혜의 화신인 관자재보살이 완전한 지혜로 깊이 명상할 때 사람의 ‘몸’을 이루는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 온갖 고통과 불행을 극복했다.”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茶時)”라는 말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매사를 이것과 저것, 선과 악, 주관과 객관, 등등으로 구분하는 분별지(分別智)를 초월하여 모든 것을 어우르며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완전한 지혜인 일체지(一切智)로서 관조(觀照)한다는 말로, 완전한 지혜인 일체지(一切智)는 '분별적 의식의 완성(perfection of discriminative awarenes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佛家에서 말하는 온(蘊)이란 집합, 구성요소로서, 오온(五蘊)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의 요소를 말합니다. 색(色)은 물질적 육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가지 요소가 화합된 일시적 현상으로 ‘몸’이라는 불변의 독립된 실체가 없으며 그 본성이 공(空)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마음의 작용으로 수(受)는 감수(感受)작용, 상(想)은 지각표상(知覺表象)작용, 행(行)은 의지작용, 식(識)은 인식과 판단작용으로 모두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들도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면 각가지 파랑이 일어나고, 바람이 그치면 모든 파도가 잠잠해지듯이, 우리 마음의 바다에 무명(無明)의 바람이 불면 온갖 작용들이 일어나고 바람이 그치면 모두 사라지기에,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다만 일시적 현상들로 그 본성은 모두 공(空)하다는 거지요.

앞에서 인용한 “인간의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合이 自我─개체성─를 이루지만, 그런 과정은 우주의 실제(實際)들과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Personality'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설명처럼 사람들이 자아로 생각하는 유기체의 부분들의 합인 육신은 ‘Personality'의 발현인 인간의 ‘참-자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가상(假象)으로서의 자아 또는 개체성이지 실재가 아니며 空하다는 것이지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 사람은 우리네 ‘몸’과 ‘마음의 작용’들이 단지 일시적인 현상들로 모두가 실재가 아니며 그 본성들이 空한 것을 알기에 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렇게 집착이 사라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책에서는 ‘명상과 이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명상과 이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가지 집고 갈 것은 책에서 말하는 ‘마음’과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각기 다른 개념으로 그 의미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위의 본문의 풀이에서는 일반적 통념의 마음이라는 의미로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대한 ‘유란시아 書’와 불교의 개념상 차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의 범주를 벗어남으로 생략합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모두 공(空)해서 실재가 아니라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하고, 피곤하면 잠이 오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싫은 사람을 만나면 짜증이 나는 등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세파에 부침(浮沈)하는 우리네 삶은 모두가 꿈이라는 것일까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이 모두 空해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일체지(一切智) 또는 책에서의 표현처럼 영적 통찰력으로 바라본 관점으로, 물질적 마음의 분별지(分別智)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는 웃고, 울고, 싸우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 현실이지요. 그래서 절집에서는 비록 경전에 사람의 ‘몸’과 ‘마음’이 모두 空하다고 하지만 중생들의 분별지(分別智)로는 그 실상을 체득하기 어려우니, 우선은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줄여가라고 합니다. 이런 집착이 점점 줄어들면 과도한 탐욕도 또한 줄어들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점점 평정의 상태로 전환되며 이렇게 고요해진 마음에서 바른 지혜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2편에서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어린아이가 그의 확장되는 체험이 인식할 더 큰 실재들과 더 나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이렇게 복잡한 설명들은 모두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고 있으며, 우주에서 고립되고 미숙한 어린아이인 인간들이 앞으로 전개되는 진화의 각 단계들에서 새롭게 체험하게 될 우주의 실재들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은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작용을 궁극에까지 분석하고 추적하면 그것들은 어떤 독자적인 실체가 없는 일시적인 현상들로 모두 空한 그 자리에서 영적 통찰력은 “영-본성의 우주 실재(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우주에서의 기나긴 진화과정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다하면 다음 단계에서 모론시아 존재로 태어나고, 모론시아 단계를 넘어서는 다시 그 다음단계인 영적 존재로 진화하는 등, 우주의 각각 다른 계(界)에는 차별적으로 진화한 다양한 개체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런 다양한 우주의 개체들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 또는 어떤 다른 에너지 체계들과 마음의 작용들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적 통찰력은 사람의 물질적 몸과 마음의 작용이 모두 빈 그 자리에서 ‘영-본성’의 실재와 가치를 감지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개체들에 내재하는 ‘영-본성’의 실재와 가치들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본성의 우주 실재(實在)들과 최고 가치들(Cosmic realities and supreme values of a spiritual nature)’이란 무엇인가요? 책에서 진화적 성장의 이 모든 연속적인 일생들과 단계들에 두루 너희들에게 전혀 변화되지 않는 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변화에 직면하여 불변인 Personality이다.”, “神으로부터 증여된 ‘Personality’가 피조물의 자아로 발현된다.”,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우주의 실재(實在)다.”, 그리고 “피조물들이 유한차원, 亞-절대차원으로 진화함에 따라 내재된 Personality가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발현됨으로 새로운 가치들이 나타나고, 절대차원에서는 神性에 이른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영적 통찰력이 감지할 수 있다는 영-본성(Spiritual nature)의 ‘우주 실재(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이란 사람에게 그리고 진화하는 모든 개체들에게 내재하는 ‘Personality의 발현으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자아, 즉 우주 실재들과, 영적진보의 과정들에서 Personality가 점진적으로 발현된 우주의 무수한 실재들의 최고 가치들’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화의 각 단계들에 있는 모든 개체들의 ‘몸’과 ‘마음 작용’들이 非-實在的인 반면에 변하지 않는 실재(實在)로서 내재하는 ‘Personality’가 바로 ‘영-본성(Spiritual nature)’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의 가치와 의미는 각각의 개체들을 구성하는 유기체의 물질적 몸이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는 ‘영-본성’인 ‘Personality'의 발현으로 나타난 개체들의 자아와 존재-격에 있다는 것이지요.

佛家에 “離諸因緣取(이제인연취), 亦不從他滅(역부종타멸), 及於己義大(급어기의대), 依如故得實(의여고득실), 모든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벗어나고 또한 소멸되는 다른 것에서도 떠나며,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도 따르지 않고, 여여함에 의지해서 궁극의 실제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를 해보면, 사람의 궁극적의 실제는 세풍에 흔들리는 수많은 인연들이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다른 현상들이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의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어떤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如如한 佛性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佛家에서는 佛性이 우주만물에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하는 반면에, 책에서 이야기하는 ‘영-본성’은 神으로부터의 증여로, 앞에서 이야기한 마음의 경우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지만, 그 작용면에서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Personality’‘靈-본성’이라고 기술할 수 있지만, 神으로부터 증여된‘Personality’가 인간에 내재된 ‘영-본성’이라는 풀이는 그동안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Personality’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너무 거리가 있고, 아무리 큰 영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표현이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사이에도 많은 異見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Personality'의 가장 일반적인 한글 번역인 ‘인격’은 앞에서 살펴본 “유란시아 필사자들에게 증여된 ‘Personality’의 전형은 자아-표현 또는 인격-실현에 일곱 차원들의 잠재성이 있다.”라는 기술처럼 ‘Personality'가 발현된 현상인 인격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격‘이라는 표현은 단지 ‘Personality’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영어나 한글의 어디에도 ‘Personality’의 본질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의 서문에서도 “우리가 유란시아의 한정된 언어를 사용하도록 제약을 받으면서, 우주의식을 확장하고 영적 인식을 향상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확대된 개념들과 앞선 진리를 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위임받은 것은 영어 단어의 상징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의미들을 전달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새로운 개념인 ‘Personality'를 ’영-본성‘으로 바꾸어 쓴다고 해서 ‘Personality'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Personality'에 대한 이해에 한걸음 다가간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서문의 기술처럼 ‘영-본성’이라는 단어도 영원하고 불변한 우주의 궁극적 실제(實際)인 ‘Personality'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단지 ’Personality'를 가리키는 상징일 뿐이지요. 112편을 기술한 ‘하늘존재’도 ‘Personality’를 정의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한 것처럼 인간의 사유나 언어체계에서 ‘Personality’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현이 없기에 상징으로서의 ‘영-본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어지는 글에서 ‘영-본성’의 의미가 좀 더 제자리를 찾아가길 기대하면서, 지금부터는 Personality’를 상황에 따라 ‘인격’ 또는 ‘영-본성’이라고 바꾸어 씁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디오니소스 11-05-17
 
이어지는 4 편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Personality 부분에 이견이 좀 있어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지식과는 달리, 지혜는 글로 충분히 전달될 수 없습니다. 혜안으로 쓰신 글이라서 부족한 이해력으로 반박하는 댓글이 잘못임을 잘  압니다.

다만 본인의 이해와 다르고, 또 평범한 불자에게 책의 진면목이 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Personality 부분은 반론해 봅니다. 이 책의 Personality는 평생 Personality를 연구한 철학자들이나 초인간 존재도 정의하지 못하는 Personality 인데, 단지 self 와 ego 개념만 존재하는 불교 철학에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첫 번째 연재에서 밝히신 14 가지의 특성을 합한 것이 Personality 이해의 정점이겠지요. 그래서 불교 교리와 잘 어울리는 일부 특성을 Personality로 집중 부각하는 이해는 왜곡이며,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정의의 속성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현존에서 인격, 초월적 신격에서는 영-본성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Personality를 표현한다면, 14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갖는 어떤 개념을 가상할 때, 숲을 분해하여 나무로 설명하는 교리적 억지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 존재에서의 Personality는 잠재가 아닙니다. 물론 14 가지 특성들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요. 106편 '실체의 우주적 차원'에서 잠재와 실재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Personality가 왜 잠재와 실재의 개념에서 벗어나는지 좀더 명확해 집니다. Personality 자체는 처음부터 잠재가 된 적이 없습니다. 불경에 바탕을 주고서는 Personality 개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인간 존재에서의 Personality를 이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 Personality를 허상으로 이해하는 데, 이것이 불교의 한계입니다.

[94:8.12]
 "싯다르타는 인간 개인성의 불멸을 거의 믿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은 오직 일종의 기능적 계속성만을 준비하였다."

더구나 유란시아 책에서는,  작금의 불교도 날이 기독교에 버금갈 정도로 잡다한 해설과 정의로 인하여 초기 붓다의 진리와 깨달음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계시로 초기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역설합니다.

[94:12.6]
"이 기록이 쓰인 당시에, 아시아의 대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과거의 암흑기 기간 동안 그토록 영웅적으로 잘 견디어 온 이 고귀한 신앙이, 인도의 위대한 선생의 제자들이 한때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는 그에게 귀를 기울였던 것처럼, 확대된 조화우주적 실체의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오래 된 이 신앙이, 자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으려고 애써온 하느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상쾌한 자극에 다시 한 번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

계시인 유란시아 책을 인간의 깨우침인 불경으로 담아보려는 것은, 작은 손거울에 서울을 담아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유란시아 책으로 불교 중흥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초기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아시아를 깨우는 일을 언젠가는 유란시아 책을 읽은 불자가 언젠가는 이룰 겁니다.

부족한 이해에서 오는 편향된 반론일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E.T 11-05-18
 
디오니소스님을 번거롭게 해드린 것에 미안합니다.

이번 글의 처음에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유란시아 書에서 만났던 어려운 부분들을 개인적인 불교 상식에 비추어 조금은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기억으로 나름대로의 소견을 정리해본 것이지, 유란시아 書의 내용을 불교의 개념들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며 해석할 수도 없겠지요. 디오니소스님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아직 글 솜씨가 부족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 유란시아 書의 독자나 불자님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란시아 書와 불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인 차이로, 간단히 예를 들면 유란시아 書의 主된 개념인 神은 불교에는 없으며, Personality와 연관된 自我도 불교에서는 諸法無我이니, 유란시아 書의 내용을 불교의 논리로 전환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하지요. 다만 유란시아 書나 불교의 가르침에 또 다른 흐름은 삶에 대한 성찰이기에, 우리네 삶에 대한 이해와 탐구에는 비록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유사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의 글에서 인용한 서문의 “인간들은 여러 명칭들로 불리는 신성한 Personalities의 관계들에 대하여 더욱 혼동이 되고 분명치 않다.”라는 기술에서 명시된 ‘여러 명칭들로 불리는 신성한 Personalities의 관계들’과 지적하신 Personality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2편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苦言에 감사합니다.

“모든 유한한 지식과 피조물의 이해는 상대적이다. 비록 높은 출처들에 수집된 정보와 소식도 단지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국부적(局部的)으로 정확하며, 개인적으로 진실하다.”, “물리적 사실들은 상당히 획일적이지만,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서 살아있고 유연한 인자(因子)이다. 진화하는 존재들은 그들 간의 관계에서 단지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진실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 미치는 한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언뜻 보기에 전적으로 진실해 보이는 것이 창조의 다른 부분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진실할 뿐이다.”, “신성한 진리, 궁극적 진리는 한결같고 보편적이지만,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영역들의 출신인 수많은 개체들이 말한 것으로, 때로는 지식의 완전함 그리고 개인적 경험의 충만함과 또한 그 경험의 장단과 범위에서의 이 상대성 때문에 때로는 세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디오니소스 11-05-18
 
유란시아 책을 읽는 불자들의 기쁨은 일반 독자와는 다르겠지만, 연재하신 글은 불자가 아니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제법무아에서의 我도 어쩌면 책에서 말하는 selfish, selfless 처럼 자아를 벗어나는 실천적 삶에 결정적인 깨우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personality와 self의 개념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경계하며 읽고 있습니다.

상대적 차원에서는 다양한 이해와 서로 다른 체험이 필연적입니다. 모두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리는 진화 세계에서 궁극 세계로 상승하려고 사용하는 저마다의 도구입니다. 유란시아 책도 불경이나 성경처럼 또 다른 도구이겠지요. 유란시아 책으로 고장 난 도구를 수리하거나 새롭게 만들 수만 있다면 진정한 시대적 계시가 될 것입니다.

인용하신 2편 글이 편협한 마음을 확 넓혀 주는군요. 새삼 자유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량 11-05-19
 
오래전부터 자주 거론되던 쟁점중의 하나가, "여러 명칭..."때문에 야기되는 혼란과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God)과 신(神-Deity) 그리고 신성(神性-Divinity)도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혼란을 피하지 않는한, 다른 사람의 깨우침이 서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Personality 도 마찬가지로 혼란을 피해야 할 중요한 용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늘 존재도 상당히 고심하면서 우리에게 그 전체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려고 최대한 애쓰는 것 같습니다. 하늘 존재가 일관된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Personality를 100% 이해해도 전체 개념을 알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관성을 포기하고 번역자의 판단에 따라  "성격" 혹은 "성격자(者)" 또는 "인격 존재"라고 그때 그때 표현을 변경하면, 전체를 이해시키려고 세심하게 배려하고 정성을 다했던 하늘 존재의 모든 설명이 전혀 소용이 없어집니다.

표현이 어떠하건 Personality는 하늘 존재가 사용했던 것처럼, 일관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서로의 의식이 확장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깨우친 특정한 의미는 그때 그때 부기하거나 덧붙여서 해설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영어를 그대로 쓰건, 임의의 한글 단어를 새로 차용하건, 어찌되었건 일관된 표현으로 전개되어야만, 하늘 존재가 들려주는 Personality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오니소스님 지적처럼 숲에 대하여 구구절절 설명하는 책을, 나무로 분해하여 자자구구 이해하면 이 책에서 들려주려는 숲은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유란시아 書와 佛經(5) 
유란시아 書와 佛經(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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