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6)   11-05-23
E.T   1,336
 

책의 서문에서 “神格은 實在의 모든 超-物質的 차원들에서 조화의 속성을─실재적 또는 잠재적─특징으로 한다.; 이 통합하는 속성은 피조물들에게 神性으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神性은 낙원의 완전한 경지의 실존적 그리고 창조자 차원들에서처럼 완전하고-완벽할 것이다; 그것은 시간-공간 진화의 경험적 그리고 피조물 차원들에서처럼 불완전할 것이다; 또는 그것은 실존적-경험적 관계들의 어떤 하보나 차원들에서처럼 완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고, 상대적일 수 있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우주의 실재다.”, “자아는 피조물들에게 내재된 ‘영-본성’의 발현이다.”, 그리고 “‘영-본성’은 궁극적으로는 신성(神性)이며 신격(神格)이다”는 설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神格은 實在의 모든 超-物質的 차원들에서 조화의 속성을─실재적 또는 잠재적─특징으로 한다.”는 기술은 마음이나 靈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잠재적 신성(神性)이며 신격(神格)이라는 것이지요. 超-物質的인 것들을 통합하고 조화하는 神格의 속성인 神性은 낙원의 절대경지에서는 실존적으로 완전하며, 이렇게 완전한 神性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인간과 같은 피조물의 유한차원들에서는 경험적으로 불완전하게 발현되기에 잠재적이며, 하보나와 같은 亞-절대의 차원에는 실존적으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는 불완전하지도 않은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비록 완전한 神性이지만 유한차원에서는 인식과 영적 감수성의 한계 때문에 불완전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수긍이 되지만, 완전한 神性이 하보나 차원에서는 실존적으로는 완전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는 불완전하지도 않은 상대적이라는 설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앞에서 살펴본 본문에서
“유란시아의 인간들에게 증여된 ‘영-본성’의 전형은 자아-표현 또는 인격-실현에 일곱 차원들의 잠재성이 있다. 이들 차원의 현상들은 유한 차원에서 셋으로, Absonite 차원에서 셋으로, 그리고 절대 차원에서 하나로 실현될 수 있다. 亞-절대 차원들에서는 이 일곱 번째 또는 총체적 차원이 ‘영-본성’의 사실로 체험될 수 있다. 이 최고의 차원은 절대를 연상할 수 있으며, 비록 무한하지는 않지만, 차원적으로 무한에 가깝게 절대를 통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주의 의미, 가치, 통찰력에서 유한 차원들의 개체들은 인식의 범주에 다양한 차이와 한계를 가지는 반면에, 亞-절대 차원에서는 거의 무한에 근접하여 궁극적으로 신성(神性)인 ‘영-본성’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유한차원에 비하여 완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절대차원의 무한에는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실존적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이지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밤하늘에 휘영청 높이 뜬 보름달은 환한 빛을 온 세상에 가득히 뿌립니다. 이렇게 맑은 가을 밤하늘에 밝은 보름달을 낙원의 절대경지에서 나타나는 완전한 神性에 비유한다면, 구름이 가득한 여름밤에는 달을 볼 수 없다가 바람이 구름을 밀어서 생겨난 작은 틈사이로 드러난 초승달이나 상현달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과 같은 유한차원의 존재들의 달에 대한 불완전한 경험이지요. 하보나 차원에서는 구름이 거의 없는 밤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이 절대경지와 같이 완전하게 둥근 모양이지만, 아직은 엷은 밤안개가 시야를 가려 보름달의 밝은 달빛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보나 차원은 유한차원에 비하면 보름달의 완전한 둥근 모양을 볼 수 있기에 경험적으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낙원에 비하면 보름달의 밝은 빛을 완전히 볼 수 없기에 실존적으로는 불완전함으로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책에서 설명하는 유한차원, 亞-절대 차원, 절대차원이라는 우주에서 진화단계들의 구분과는 차이가 있지만, 佛家에서는 부처의 경지를 절대차원이라고 하는 반면에 그 이전은 모두 완전한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한 미망(迷妄)의 단계들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불성(佛性)을 덮고 있는 미혹의 구름들이 벗겨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욕계(欲界)는 육신의 오관(五官)을 통한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로 6개의 하늘세계가 있으며 각각의 세계들을 지나면서 욕망이라는 먹구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고, 색계(色界)는 감관의 욕망들은 벗어났으나 물질적 형상의 틀에 묶여있는 세계로 18개의 하늘세계가 있다고 하며 이들 세계들을 통과하면서 형상의 틀에서도 벗어나며, 무색계(無色界)는 물질적인 것도 없어진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로 4개의 하늘세계가 있으며 점차적으로 완전한 절대의 경지에 가까워지지만 아직도 완전한 불성을 보지 못하는 미혹의 세계라고 하며, 무색계를 넘어 절대의 경지인 불지(佛地)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불성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책에서는 왜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神性’‘靈-본성’을 각각 다른 명칭으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서문에서
“신격(神格)은 신성한 모든 것의 원천이다. 神格은 특징적으로 그리고 변함없이 신성하다, 그러나 신성한 모든 것이, 비록 그것이 神格과 조화되고 靈的, 心的, 또는 人格的으로 神格과 일치의 어떤 단계를 향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神格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神格에 대한 논리를 神性에 대입해보면; 神으로부터 증여된 ‘靈-본성’이 神性이라고 해도 진화와 상승의 여러 단계에 있는 개체들이 불완전하며 차등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영-본성’을, 비록 개체들의 ‘영-본성’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완전한 神性의 현현(顯現)을 향해 발전되어 간다고 하더라도, 神性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佛家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 진여(眞如), 법신(法身), 법성(法性), 여래장(如來藏), 일심(一心) 등의 많은 이름들이 모두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명칭들입니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불성과 여래장의 관계가 앞에서 말한 神性과 ‘영-본성’의 관계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성은 완전한 깨달음 자체를 의미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완전한 깨달음인 불성을 사람은 물론 세상의 모든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을 사람들은 무지(無知)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무지(無知)에 싸여있는 불성을 여래장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佛家에서는 여래장의 의미를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1)일체의 모든 법을 스스로 간직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2)일체의 모든 법을 간직할 장소가 된다는 뜻에서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3) 간직했던 모든 법을 인연에 따라 현상세계로 나타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神性과 불교에서 말하는 佛性은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며 종교적 의미에서도 직접적인 대비는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내재된 ‘영-본성’이 유한차원을 넘어 亞-절대차원에 이르기까지 영적진보의 여러 단계들에서의 역할과 작용, 그리고 절대단계에서 완전한 神性으로 현현(顯現)되는 과정과, 佛家의 수행자가 내재된 佛性을 덮고 있는 무지(無知)의 먹구름을 오랜 수행을 통하여 하나씩 둘씩 걷어내고 완전한 佛性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4장

무제무애(無際無涯)의 ‘영-본성’

[4]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지만,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의 정체성을 통합할 수 있다.”, “그것은 중력에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반응하는 세 가지 에너지들과는 구별되게 ‘영-본성’ 회로에 오직 질적인 반응만 나타낸다.”


위의 본문에서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고 합니다. 한편 앞장에서는 인간에 내재하는 ‘영-본성’은 인간의 자아로 표현되며, 인격으로 실현되어 인간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정체성이 없다는 ‘영-본성’이 인간차원에서는 자아로 표현되어 정체성을 가진다면 ‘영-본성’에 정체성이 없는 것일까요? 정체성이 있는 것일까요?


앞의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한의 단계들에서 진화하는 개체들이 내재하는 ‘영-본성’에 대한 인식의 근간인 우주의 의미, 가치, 통찰력이라는 3가지 축이 절대단계에서는 모두 무한으로 확장되어 어떤 경계의 구분을 의미하는 차원이라는 개념마저 소멸되어 버리고, ‘영-본성’의 궁극적 실제인 神性이 본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방팔방, 佛家에서 말하는 시방(十方)을 둘러보아도 신격(神格)의 속성인 神性은 어떤 경계나 한계가 없어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이 무한하지만, 한편으론 우주의 크기에 비한다면 좁쌀은커녕, 먼지나 티끌보다도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인간과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들에도 잠재된 神性으로서의 ‘영-본성’으로 내재한다고 합니다.


정체(正體)라는 말은 참된 본디의 형체를 뜻하며, 정체성(正體性)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런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를 뜻합니다. ‘영-본성’을 크기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한의 극대(極大)에서 무한의 극소(極小)까지 어떤 한계가 없으니, 무엇이 ‘영-본성’의 참된 본디의 형상이며, 변하지 않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유한차원의 존재들이 ‘영-본성’의 궁극적 정체성을 알 수 있을까요? 神의 경지라면 몰라도, ‘영-본성’의 정체성을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유한차원의 한계를 넘는 일 같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지만,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의 정체성을 통합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뒤집어 보면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지만,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의 정체성을 이룬다.”라고 고쳐 쓸 수 있습니다. 神으로부터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인간의 자아로 표현되고 인격으로 실현되며, 우주의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들의 정체성으로 나타납니다. 앞에서 “인간들은 오직 물질적 감각에서만 정체성을 갖는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건이나 사물들을 독립된 단위의 물질적 존재나 현상으로만 인식하는 물질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영-본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영-본성’에도 어떤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인간의 물질적 감각을 초월한 잠재적 神性으로 우주의 실재이며, 그 본질은 佛家의 표현을 빌리면 ‘空’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空’이라는 개념은 佛家에서 최고의 경전이라고 말하는 화엄경(華嚴經) 80권 전체가 空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난해하지만, 짧은 상식으로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 ‘空’은 ‘없음’을 의미하는 허무(虛無)의 空이 아니며, 有나 無라는 물질적 감각을 초월하고, 분별적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깨달음에 의해서만 체득할 수 있으며, 우주의 모든 실재들의 궁극적 실제(實際)로 진공(眞空)이라고도 하지요.


불교의 선가(禪家)의 육대조사(六代祖師)인 헤능(惠能)이 道를 깨친 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변오일체만법(便悟一切萬法) 불리자성(不離自性) 모갑계언(某甲啓言) 하기자성(何期自性) 본자청정(本自淸淨) 하기자성(何期自性) 불생불멸(不生不滅) 하기자성(何期自性) 본자구족(本自具足) 하기자성(何期自性) 무동무요(無動無搖) 능생만법(能生萬法), 모든 법이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음을 문득 깨닫고 내가 말씀드렸다.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알았겠으며, 어찌 자성에 생멸(生滅)이 없음을 알았겠으며, 어찌 자성이 본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겠으며, 어찌 자성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능히 만법(萬法)을 냄을 알았겠습니까!” 여기서 자성(自性)이란 사람의 참된 본성인 불성(佛性)을 말하는 것으로, 道 즉 불성(佛性)을 깨닫기 전에는 어떻게 불성(佛性)이 본래 어떤 형상이나 모양도 없이 청정하고, 생멸(生滅)이 없이 영원불변이며,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세상의 만법(萬法)을 이루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제 道를 깨닫고 보니 나의 참된 본성인 불성(佛性)이 그런 줄 알았다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불성(佛性)과 ‘영-본성’을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지만, 영원불변하고, 모든 살아있는 에너지 체계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정체성으로 나타난다.”라는 설명처럼 작용면에서는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본성’에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영-본성’의 궁극적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유한한 차원들에 존재하는 무수한 개체들에서 ‘영-본성’의 발현(發現)으로 나타난 자아의 정체성은 ‘영-본성’의 현상들로, ‘영-본성’의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한마다로 줄이면 佛家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정체성이 없는 ‘영-본성’은 내주하는 유기체의 영적수준과 인식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자아와 인격(존재-격)으로 개체의 정체성을 나타나며, ‘영-본성’은 또한 이렇게 나타난 모든 유기체의 정체성을 통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기체의 정체성이란 의미를 다시 돌아봅니다. 앞의 3장에서
“인간의 유기체에서 인간의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合이 자아(自我)─개체성─를 이루지만, 그런 과정은 우주의 실제(實際)들과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영-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기술처럼 유기체의 부분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이라는 유기체적 자아-개체성-는 ‘영-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영-본성’이 통합하는 유기체의 정체성이란 각각의 유기체에 내재된 ‘영-본성’의 차별적 발현으로 나타난 다양한 자아의 정체성들로, 神性이 모든 초-물질적인 것들을 통합하듯이 ‘영-본성’은 물질적, 모론시아적, 그리고 영적인 자아의 다양한 정체성들을 통합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다양한 정체성들을 통합한다.’라는 표현은 마치 여러 개의 다른 눈덩이를 모아서 하나의 큰 눈뭉치로 만든다는 의미의 통합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들의 근원이 하나다’라는 뜻으로 물질적, 모론시아적, 또는 영적 자아의 다양한 정체성들은 본질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영-본성’으로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좀 더 발전시키면 모든 사람은 물질적으로 다양한 형상들이며, 자아의 정체성도 개별적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물질적 형상을 넘어 내재하는 동일한 ‘영-본성’의 실재를 인지할 수 있으며, 차별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본질적인 평등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본성’은 무수한 개체들의 자아로 표현된 개별적이고 분리된 현상적 정체성을 통합하는 동시에,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없는 평등의 장(場)을 펼친다는 것이지요.


한동안 온 나라가 사대 강 사업으로 시끄러웠고, 언제나 그런 소요가 잠잠해질지 알 수 없지만, 깊은 산속의 작은 옹달샘에서 발원한 강들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한강에 흐르는 물은 한강 물, 또 다른 강물들은 낙동강 물, 영산강 물, 등등의 각각 다른 이름들을 가지며, 수질도 각각이고, 그동안의 쓰임새도 달랐지만, 모든 강물들이 흘러 바다에 이르면 그런 차별적인 이름들은 모두 사라지고 동일한 바닷물로서의 한 가지 맛으로 바뀝니다.


앞장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여래장(如來藏)을 佛家에서는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내재하는 여래장은 그 자체로는 절대 평등하여 어떤 차별적인 모습이 없지만 단지 인연에 따라 현상세계에서 만법(萬法)을 이루고 삶과 죽음, 그리고 열반이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지요. 이렇게 절대 평등한 여래장의 본질은 진여(眞如)의 참모습으로 일체의 차별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고 하는 반면에, 절대 평등하고 차별상이 없는 여래장은 일체의 모든 성품을 완전하게 갖추고 인연에 따라 현상세계의 온갖 차별상을 나타낼 수 있기에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라고 하지요.


본문은 이어서
“그것은 중력에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반응하는 세 가지 에너지
들과는 구별되게 ‘영-본성’ 회로에 오직 질적인 반응만 나타낸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에너지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56편에서
“물리적 또는 물질적 창조는 무한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게 통합되어 있다. 힘, 에너지, 일률(一率)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원에서는 하나다.”라고 합니다. 물리적이나 물질적 창조는 무한하지 않으며, 이런 창조를 이루는 것들은 힘, 에너지, 일률(一率)이라는 세 가지로, 이것들은 완전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거지요.


조금은 생소한 표현들로 ‘
힘, 에너지, 일률(一率)’은 원문에서는 ‘Force, Energy, Power'라고 합니다. 물리학적 소양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구체적인 내용은 할 수 없지만, 개략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1) Force는 ‘힘’이라고 표기하며, ‘Power'가 외부로 나타난 ’힘‘을 말한다고 합니다.

2) Energy는 일을 하는데 쓰이는 ‘Power’의 양을 말하며, ‘Force'와는 달리 외적인 존재에 직접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3) Power는 잠재능력까지를 포함하는 ‘힘’의 가장 포괄적인 말로, 물리학적으로는 단위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을 양을 의미하는 일률(一率)이라고 표기하며, 그 단위로는 와트(W) 또는 마력(馬力)이 있다고 합니다.


본문의
“‘영-본성’은 중력에 질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반응하는 세 가지 에너지들과는 구별되게 ‘영-본성’ 회로에 오직 질적인 반응만 나타낸다.”라는 말은 앞에서 이야기한 ‘힘, 에너지, 일률(一率)’은 물리적 또는 물질적 창조와 관계된 포괄적 의미의 물리적인 힘으로 중력에 관계되지만, ‘영-본성’은 순수한 靈的 實際로 물리적인 힘과는 달리 영적(靈的)으로 ‘영-본성’ 회로에만 반응 한다는 거지요.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블루베리 11-05-26
 
갑작스럽게 읽다보니, 불교 해설도 아니고 유란시아 해설도 아니고 용어도 설명도 혼란스럽네요. 깊은 불심과 새로운 유란시아 내용과의 괴리에서 비롯된 글같아서 이해는 됩니다만, 아무리 용어를 바꾸어 해석해도, 불심에 묶여있는한 깨우쳤다는 마음의 미망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아집을 벗어나야 길이 보인다면, 집착하는한 스스로를 굴레에 가두고 있는 셈이지요.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의 제법무아를 진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유란시아서가 일원론을 펼친다고해서 소크라테스부터 노자와 석가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일원론을 외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통한다고 볼 수는 없지요. 오히려 그런 과거의 진리를 이용하여 새로운 계시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유란시아 書와 佛經(7) 
유란시아 書와 佛經(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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