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7)   11-05-27
E.T   1,486
 

[5] “'영-본성'은 유일(唯一)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일하다. 그것은 영원과 낙원에서 유일하다. 그것은 증여되었을 때 유일하다, 복제들이 없다. 그것은 존재의 모든 순간 내내 유일하다. 그것은 神에 관하여 유일하다 - 神은 ‘영-본성’이 내재된 존재들(Persons)을 차별 대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神은 또한 그들을 합하지 않는다 - 그들은 합해질 수 없다, 그들은 연합할 수는 있지만 합쳐질 수 없다.”, “‘영-본성’은 다른 ‘영-본성’의 현존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본문에서 “
'영-본성'은 유일(唯一)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우주의 실제(實際)인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정체성이 없는 ‘영-본성’이 어떻게 유일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것들과 구분되어 유일무이한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3장에서 ‘영-본성’이 발현되는 차원들 중에서 마지막 절대 단계에서는
‘하나의 차원’이라는 표현도 모든 경계와 구분이 사라져 차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평등하고, ‘하나의 차원’라고도 부를 수 없는 절대의 경지를 사람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억지로 ‘하나의 차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풀이했었습니다.


여기서 “
'영-본성'은 유일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는 말도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우주에서 진화하는 모든 존재들에서 자아로 표현되는 ‘영-본성’의 다양한 현상들에 비하여, 인간의 인식과 이해를 초월한 ‘영-본성’의 본질은 물질적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정체성이 없으며, 그 실체를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영-본성’의 본질을 인간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영-본성’은 모든 것과는 다르게 시간과 공간에서, 영원과 낙원에서, 그리고 인간에 증여될 때에 유일무이한 하나라는 표현을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복제들이 없다.”라고 합니다. 정체성이 없이 무한하고 영원한 ‘영-본성’을 어떻게 복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에서 ‘영-본성’의 궁극은 神性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
그것은 神에 관하여 유일(唯一)하다.”라고 합니다.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이 神에 관하여 유일하지 않다면, 神은 여러 개의 神性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니, 당연히 유일할 수밖에 없지요.


佛家에서는
“無邊法相(무변법상) 一實性義(일실성의) 唯住一性(유주일성); 무한하고 영원한 진리의 모습은 하나의 진실한 뜻으로 오직 하나의 본성에 머문다.”라고 합니다.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모두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를 나타내는 佛家의 가르침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절집에 가면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이문(不二門)이라고 부르는 일주문이 있습니다. 모든 차별적인 것을 떠나서 평등한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상징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머물러계실 때, 부처님을 따라서 출가한 사문(沙門)이 아니라 속세에 살면서도 불법(佛法)을 깊이 이해하여 상당한 경지에 있는 ‘유마거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도 유마거사의 불법(佛法)에 대한 깊은 이해를 찬탄하며 제자들을 유마거사에게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유마거사의 집을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 덕정(德頂)보살, 선안(善眼)보살, 정해(淨解)보살 등 여러 보살들이 문수보살과 같이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유마거사의 집에서 큰 법회가 열렸는데 그날의 주제가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여러 보살들이 ‘불이법문’에 대해서 각자가 생각한 바를 말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선안(善眼)보살은 “하나의 모습을 가진 것과 아무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있는 것이 곧 아무런 모습이 없는 것을 안다면 모습의 있고 없음에 얽매이지 않고 평등을 체득합니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뇌천(雷天)보살은 “지혜와 무명(無明)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참 본성은 지혜 자체입니다. 지혜는 집착될 수 없고 일체를 초월합니다. 그 안에서 이중성(二重性)이 없이 평등하게 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여러 보살들이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나서, 법회에 모인 보살들이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 지혜가 으뜸이라는 문수보살에게 불이법문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문수보살은 “내 생각에는 말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나타내 보여주는 것도 인지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유마거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자, 이에 문수보살은 진심으로 그를 칭송했습니다. “위대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문자도 없고 언어도 없는 것,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드는 것입니다.”


‘높다, 크다, 좋다, 선하다, 진실이다,’ 등등의 모든 말과 글은 각각 상대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에서 “
'영-본성'은 유일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는 구절은 영-본성’의 궁극적 본질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것으로, 상대적 개념인 말이나 글로서 본질의 절대적인 의미를 표현하려니 문제가 있는 거지요. 佛門의 보살들이 유마거사가 상대적인 말을 떠나서 침묵으로 표현한 절대의 경지를 이해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영적수준이 높다고 하면 “'영-본성'은 유일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라는 말은 필요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凡人들의 이해를 위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영-본성’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영-본성'은 유일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절집의 이야기 중에 선안(善眼)보살이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일상무상(一相無相)’이라고 합니다. 佛家에서 말하는 法의 실상(實相)은 일체가 평등하여 一相이지만, 어떤 정해진 모양이 없는 無相이라는 뜻이지요. 본문에서 “
'영-본성'은 유일하다,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는 말도 궁극의 ‘영-본성’은 모든 상대적 차별을 초월하여 일체가 평등한 하나로 一相이지만, 앞에서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는 설명처럼 어떤 정해진 모양이 없는 無相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
神은 ‘영-본성’이 내재된 존재들(Persons)을 차별 대우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의 영어 원문은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로 단순한 문장이지만, 이면에 숨은 뜻은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봅니다.


1편에서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영역과 각각의 세계의 모든 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에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모든 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은 우주 아버지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를 인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神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either spiritual or material.)”라고 하는 반면에, 192편에서는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물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제가 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였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여라. 약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어린 자에게 봉사를 게을리 하지 마라. 두려워하거나 편애하지 말고 복음을 전도하라: 하느님은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라.(Remember always that 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고 합니다.

1편에서 말하는 “神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God is no respecter of persons, either spiritual or material.)”에서 ‘Persons’는 바로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영역과 각각의 세계의 모든 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지구를 포함한 다른 행성들과 지역우주, 초우주를 거쳐 하보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영역에 거주하는 무수한 존재들의 총칭인 반면에, 192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Persons’는 좁은 의미로 베드로가 복음을 전도해야할 대상으로서의 약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어린 자와 같이 ‘사람들’을 지칭한 것이지요, 'Person'은 사람, 인격, 몸, 등의 여러 가지 의미들로 풀이되지만, 철학적으로는 (自意識을 가진 理性的) '존재'라고도 풀이합니다. 위의 문장들에서 ‘Persons’라는 단어도 그 쓰임새에 따라 다르게 풀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
神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위의 물음을 “神은 왜 모든 사람들을 차별대우 하지 않을까요?”로 바꾸어 묻는다면 성경에서의 말씀과 같이 神이 창조한 사람들은 모두 神의 자녀이기 때문에 神은 사람들을 차별대우 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논리는 성경의 말씀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58편에서의 설명에 따르면 동물로부터 진화한 인간의 최초의 조상이 약 100만 년 전에 출현하였고, 이렇게 출현한 인간에게 ‘영-본성’이 증여됨으로 비로소 인간이라는 자아의 정체성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인간의 유기체에서 인간의 유기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合이 자아(自我)─개체성─를 이루지만, 그런 과정은 우주의 실제(實際)들과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영-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기술처럼 동물로부터 진화한 인간의 ‘몸’이라는 유기체의 출현은 ‘영-본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렇게 출현한 인간에게 ‘영-본성’이 증여됨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아의 정체성이 나타났으며, 비록 사람이라는 물질적 유기체의 형상에는 무수한 차별이 있어도 우주의 실재인 인간의 자아는 神으로부터 증여된 동일한 ‘영-본성’으로, 본문에서 “그것은 존재의 모든 순간 내내 유일하다.”라는 기술과 같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도 동일한 ‘영-본성’이 내재하기에 神은 사람들을 그리고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앞장에서의 인용문 중 “
‘영-본성’은 그 자신의 선택을 통하여 그 정체성의 자리를 한때의 물질-지성 체계로부터, 생각조절자와 공동으로 ‘영-본성’의 현현(顯現)을 위해 새로운 매체로 창조된 보다 높은 모론시아-혼 체계로 전환하는 힘을 소유한다.”라고 했습니다. 위의 본문을 좀 더 확대해석해보면; 우주의 기나긴 진화 경로에서 첫 번째 고리인 인간은 ‘영-본성’의 발현(發現)을 위한 매체로서의 일시적인 물질-지성 에너지 체계이며, 인간의 죽음을 넘어 살아남는 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론시아 존재도 또한 ‘영-본성’의 지속적인 발현(發現)을 위한 매체이며, 이후에 이어지는 영적 존재들 모두도 궁극적으로는 “‘영-본성’의 顯現을 위한 단계별 새로운 매체들”이라는 것이지요.


이 글의 주제인 神으로부터 증여된 ‘영-본성’은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영역과 각각의 세계의 모든 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 모두에게 증여되어 각각의 자아로 표현되며,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그들에게 증여된 ‘영-본성’의 발현(發現)을 위한 매체들로서 이들 존재의 본질은 ‘영-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1편에서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천체와 각각의 세계의 모든 영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에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라고 합니다. 神과의 영적 교감이 충만한 사람은 ‘우주 아버지의 자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凡人들에게는 막연한 개념입니다. 우주 아버지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는 무엇일까요?


유한차원의 개체들의 자아는 그들에게 증여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이 차별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주 아버지의 자아는 온전한 神性의 체현(體現)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잠재적 神性인 유일한 ‘영-본성’이 모든 영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에게 증여되었기에
우주 아버지는 그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의 모든 것을 드러낸 것만이 이니라, 그의 모든 것을 주었지만, 진화하는 개체들은 내재하는 ‘영-본성’의 영원하고 무한한 실상(實相)을 겨우 부분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기에 우주 아버지의 신성한 자아를 알지 못할 뿐이지요.


본문은 이어서
“神은 또한 이들을 합하지 않는다. - 이들은 합해질 수 없다, 그들은 연합할 수는 있지만 합쳐질 수 없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神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 하지는 않지만, 이 모든 개별적 존재들을 하나로 합하지 않으며 또한 합해질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 내재된 동일한 ‘영-본성’이 차등적으로 발현된 현상인 자아와 인격(존재-격)은 각각의 개체들이 영적으로 진화한 수준의 차이에 따라 무한하게 다양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우주의 존재들을, 마치 육체적으로 성숙의 정도가 다른 어린이와 노인을 합해서 젊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합해서 새로운 존재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전능한 神이라고 하더라도 차별적 현상인 다양한 존재들을 그 본질에서는 동일하다는 이유로 하나로 합할 수 없으며, 또한 합해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이어서
“‘영-본성’은 다른 ‘영-본성’의 현존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들의 본질은 모두가 동일한 ‘영-본성’으로 다른 개체들에 내재하는 ‘영-본성’과 직접 반응하고 연합할 수 있다는 거지요. 자신에게 내재하는 ‘영-본성’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록 자신과는 다른 여러 가지 현상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본질인 ‘영-본성’을 감지할 수 있으며, 우주에서 진화하는 모든 개체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앞에서 인용한 “어떤 존재가 인격적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우주의 유기체 안에서 상대적인 개별화를 인식한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나, 앞장에서의 “靈의 통찰력은 ‘영-본성의 우주 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을 感知할 수 있다.”라는 기술도 같은 의미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각각의 다른 존재들끼리 내재하는 ’영-본성‘을 통하여 상호 반응하며 서로 연합하고 협동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 간에 내면의 ‘영-본성’을 인식하여 서로 교감하고 연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103편에서는 “사람의 영-본성(Spiritual nature)은 그에게 우주를 밖에서 안으로 돌려놓는 기회를 준다. 그러므로 인격체험(Personality experience)의 내면에서 전일(專一)하게 볼 때 모든 천지 만물이 사실상 영적으로 보인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체험(Personality experience)이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내주하는 ‘영-본성’의 用의 측면으로서, “어떤 존재가 인격적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우주의 유기체 안에서 상대적인 개별화를 인식한다는 것이다.”라는 설명과 같은 의미로, 모든 개체들에 내재하는 동일한 ‘영-본성’에 대한 체험과 같은 의미이지요. 따라서 “인격체험의 내면에서 전일(專一)하게 볼 때 모든 천지 만물이 사실상 영적으로 보인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불가(佛家)에서 법계(法界)의 총체성을 설명하는 열 가지의 심오한 원리라고 하는 십현문(十玄門)중에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법계(法界)의 모든 현상은 그 이면에 나머지 부분이 감추어져 있음으로 法界의 총체성은 이렇게 드러난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으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각각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영-본성’의 차이점을 달에 비유해서 살펴본 것처럼,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의미를 달의 비유로 간략히 소개합니다. 음력으로 매달 초순이면 초승달이 떠올랐다가 여드레 날 쯤에는 반달이 되고, 보름이 되면 둥근 보름달이 됩니다. 그믐을 지나 떠오른 초승달은 둥근 달의 대부분이 가려져 여인네들의 눈썹처럼 가느다란 모습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힘들게 밝혀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달의 원래 모습이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느다란 초승달의 모습 뒤에는 둥근달의 나머지 부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지요. 이렇게 어떤 것의 발현(發現)은 단지 일시적으로 드러난 부분일 뿐으로 전체적인 실상(實相)이 아니며, 표면에 나타난 현상들은 항상 이면에 감추어진 부분을 포섭하고 있다는 겁니다. 초승달을 쳐다본 사람이 보름달의 둥근 모양을 알지 못한다면 달은 가느다란 눈썹모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달의 실상(實相)을 알고 있기에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불가(佛家)에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진여(眞如)의 표상이지만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중생들은 표상의 이면에 내재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고 차별적인 현상에만 집착한다고 합니다.


우주 유기체 안에서 모든 현상은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이루어져 우주의 총체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 유기체의 총체성을 이해한다면 우주의 모든 각가지 상이한 차별적 현상들이 함축하고 있는 감추어진 부분들도 알 수 있기에 다양한 현상들의 차별상을 넘어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인용한 본문의 “
神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이성적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또는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우주의 실재다.”라는 구절들도 神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의 차별적인 현상들을 넘어 본질인 ‘영-본성’의 동일성을 보기에 모든 우주의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고 우주의 실재로 포용하지만, 유한한 존재들은 본질을 알지 못하기에 차별적인 현상들만을 본다는 것이지요.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블루베리 11-05-27
 
영-본성을 이해하는 시각이 보통 꼬이신 것이 아니네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시리라 믿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영-본성이 '궁극적이고 절대적 실재=진여'라면, '정체성=자아' 라는 우주 공간의 실재는 '허상=공'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런 해석이라면 유란시아서의 계시대로 사유의 바다에서 고적하고 헛된 무인도에 닿는 운명으로 끝날지 모릅니다. 그것이 싯달다 부처님이 이룬 것이니, 원한다면 그곳에 이를 수 있겠지요. 그것이 불교의 해탈입니다.

허상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려고 유란시아서나 불경이 있는 걸까요?

하시는 말씀이 '정체성이 없다'는 영-본성을 강조하다가, 다시 '정체성=자아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을 왔다갔다 헤메시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설명도 혼란스러움을 부추기고 있구요.
본인의 마음에서는 잘 정리되면서 탁한 모습이 맑게 닦아지는 듯 느끼겠지만,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자기모순은 거울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입니다. 마음이 보고싶은 것만 보라고 눈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흔히 사념처관으로 삼매에 든다는데, 영-본성과 마음이 불성을 암시하는 동일한 단어로 생각하면서 유란시아 책을 읽고 있다면, 초등학생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사람은 존재하다가 죽는다고 하네요'라는 독후감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 유일성의 영-본성을 인식불가의 동일성과 무정체성으로 대치하고, 무차별 사랑의 속성을 무차별 개체라고 해석하는 궤변은 앞으로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불경에서 핵을 이루는 마음과 불성이란 두개의 단어로는, 유란시아서에서 말하는 영 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러니 영-본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거 아닐까요. 암튼 결론이 긍금해지긴 하네요.
여량 11-05-27
 
신성한 진리는 일률적으로 정의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마다의 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혹은 철학적 소양이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유란시아 책의 진리들은 저마다 부분적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 익숙하면 성경 진리와 연관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고 큰 감동을 받지만, 반대로 철학이나 타 종교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또 어렵사리 이해해도 마음으로 느끼는 감동보다는 지식으로 수긍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교적 소양이 깊어서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잘 아는 분이라면, E.T 님의 글에 큰 공감을 느끼면서 유란시아 책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물론 기독교인에게는 불교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의 내용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반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진리는 특정 종교적 시각이나 해석으로 확정되기 보다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결국에는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서로 공감되지 않지만 많은 대화가 이어진다면 간격도 좁아지고 결국에는 공감하리라고 봅니다.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차원에서는 모든 방향으로 의식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영적 진화에 기틀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개성도 다르고, 재주도 다르니 저마다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도록, 서로 힘을 합하는 합동이 가장 실질적이고 참된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조용히 가다듬으며 무언으로 성원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E.T 11-05-27
 
불루베리님이 제기한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지요.

전혀 다른 언어로 쓰여진 U책과 佛經을 동일하게 읽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U책이나 佛經은 인간의 올바른 삶과 깨우침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U책의 서문 1장에서 “神格은 실제적이던 또는 잠재적이던 실재의 모든 초-물질적 차원들을 통합하는 속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이 통합하는 속성은 피조물들에게 神性으로 가장 질 이해된다.”라는 기술로 U책이 시작되고, 佛經에서는 불루베리님이 인용한 것처럼 우주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으로 一切唯心造라고 하지요.

U책이나 佛經의 기술이 진살하다면, U책의 설명처럼 神性은 실재의 모든 초-물질적 차원들을 조화시켜 통합하기에 궁극적으로는 佛家의 논리도 수용할 수 있으며, 佛家의 一切唯心造도 우주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지어낸 것이기에 一心으로 U책의 논리도 수용할 수 있겠지요. U책에서는 神性의 무한한 작용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불경에서도 一心의 불가사의한 공능을 설명하고 있지만, 神性이나 一心의 그림자나 겨우 알고 있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참된 진리에서 너무 멀리 있기에 불루베리님이 제기한 문제는 잎으로 풀어가야 할 숙제일 것 같습니다. 

참고로 103편의 본문을 인용합니다.; “사회적 또는 인종적 집단에서의 종교적 체험의 일관성(Unity)은 개인에 내주하는 神-단편(斷片)의 동일한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이타적 관심은 인간에 내재하는 이 神性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인격은 두 사람이 서로 같지 않고 독특하기에, 어떤 두 사람도 그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神性인 영의 지도와 충동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피하다. 사람의 집단은 영적 일관성(Unity)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결코 철학적 획일성(Uniformity)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견해와 체험에 대한 해석의 이런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여 가지의 다른 정의들을 내렸다는 사실이 보여준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그에게 내주하는 神-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신성한 충동에 대한 그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따라서 그런 해석은 독특할 수밖에 없고, 다른 모든 사람의 종교적 철학과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코너킥 11-05-29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댓글이 조롱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책의 요점과 많이 달라서요. 우주 의식을 고취시키고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책의 목적이며, 모든 줄거리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창조와 인간과 우주 운명을 계시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업은 있지만 창조는 없다고 압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귀결되는 마음작용으로 우주 만물을 설명하고 다루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존재에 대한 답을 찾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불교의 우주관"을 검색해보니, 내세론에 등장하는 정토마저도 실체가 아닌 것으로 정의합니다. (http://kr.buddhism.org/zen/eastern-buddism3.html)

불교에서의 영-본성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고 이해됩니다. 그런데 유란시아 영-본성은 결코 동일한 적이 있을 수가 없는 절대적 실체로 설명하고 있으니, 동일한 개념으로 다룰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 없다는 Personality를 아무런 공통되는 배경도 없이 불교에서의 개념에 빗대어 무작정 설명하면, 참외 밖에 모르는 분이 참외를 가지고, 수박을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도 아니고 유란시아도 아니라는 말이 공감이 됩니다.

영-본성 탐구도 좋지만, 유란시아의 우주론과 불교의 우주론(아니면 존재론도 좋고요)에서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다면 먼저 배우고 싶네요. 그 배경에서 신에 대한 일관성을 느끼고 다양한 종교적 해석으로 신에 가까이 가는 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그런 배경이 있다면 영-본성도 이해하기도 쉽고요. 불교를 모르는 생뚱맞은 얘기였다면 사과드립니다.
     
꼴라쥬 11-05-30
 
끼어들 자리는 아니지만, '유란시아 영-본성은 결코 동일한 적이 있을 수가 없는..'은 아닌것 같은데요. 지능이나 마음이나 본성은 동일한 우주의 자질(?)인 것 같은데요?
          
코너킥 11-05-31
 
의미에 혼란이 아주 크네요. 글자 그대로 영-본성(spritual-nature)과 임의의 영-본성(personality)를 같이 읽다가 착각했습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분간이 힘든 어둔 곳에 들어가니 본의아니게 멀쩡한 정신이 어리벙벙해지는 꼴이 되었네요.

불교식의 유란시아 논리가 초보 불자에게 필요하다고 하시니 그려려니 넘어가야겠지요.

다만 그런 태도가 유란시아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일인지 방관하며 불자들의 사랑이나 얻으려는 아양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겁니다.

참외도 수박도 다 둥그니까 수박과 참외가 동일하다는 태도는 어린아이의 떼입니다.  절대차원이라면 영-본성(nature)이 동일하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능, 마음, 영-nature은 명칭이나 역할이 동일할 뿐 같지 않습니다. 매시간-공간에서 한순간도 동일한 실재로 존재할 수 없지요. 변하지 않는 personality 만 예외됩니다. 이 개념이 불교에는 불가능하니 궤변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여량 11-05-30
 
불교는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을 대변하는 아주 뿌리가 깊은 종교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불경의 진리를 부분적이나마 조금씩은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유란시아 책의 설명이 없더라도 불교에는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그런 퍼서낼러티 개념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란시아 책을 이해하려는 불자들에게는 이 생소한 개념은 크나큰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재되는 글의 제목이 "유란시아 書와 佛經"인 것은 새로운 개념으로 난관에 부딪칠지도 모르는 불자들에게 유란시아서를 쉽게 입문할 수 있는 1차적인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불자들을 위하여 정리되고 있는 글을 마치 유란시아 독자를 불교로 회심시키는 글로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란시아서로 접근하는 불교의 시각을 알아야만, 책에 담긴 진리의 다양한 접근과 그 체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란시아나 불경의 내용을 희석시키는 글이 아니라, 어울릴 수 있도록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는 글로 읽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도 점차 확대되리라 봅니다.
유란시아 書와 佛經(8) 
유란시아 書와 佛經(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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