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2)
132에서; “그러나 진리는 믿음의 이행 없이는 절대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 지혜, 윤리, 그리고 이상(理想)들이 그의 믿음보다, 그의 고귀한 희망보다 결코 더 높을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그러한 진실한 믿음은 깊은 반성,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기초한다. 믿음은 영적으로 변화된 창조적 마음의 靈感이다.”
이렇게 ‘사람의 물질적 마음의 눈과 靈化된 지성의 눈이 조화된 삶의 경험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진리는 ‘영적으로 변화된 창조적 마음의 靈感인 믿음’을 실제적인 삶에서 행하지 않고는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욕망으로 추동된 맹신(盲信)이나 福을 구하고 永生을 기원하는 물질적 마음의 기원이 아니라 靈的으로 변화된 창조적 마음의 영감(靈感)이라고 합니다.
196편에서 “너희들이 주(主)의 생애를 고찰할 때, 기도나 혹은 종교적 삶의 다른 면들에 관하여, 그가 가르쳤던 것 보다 그가 행하였던 것을 찾아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神에 대해서 그리고 神의 왕국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 보다는, 그가 神에 대한 믿음을 실제로 행했던 것, 즉 그가 진리를 몸으로 체현해가는 그의 삶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儒家에서의 “知是行之始(지시행지시), 行是知之成(행시지지성), 知는 行의 시작이고, 行은 知의 완성이다.”이라는 말처럼 인간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 보다는, 그의 생애를 고찰할 때 그가 행하였던 것을, 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이루었던 그의 믿음의 실천인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살펴보라는 거지요.
그리고 “진실한 믿음은 깊은 반성, 진지한 자아-비판,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의식 위에 기초하며, 이런 믿음은 영적으로 변화된 창조적 마음의 영감(靈感)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으로 변화된 창조적 마음의 영감(靈感)’이란 어떤 것일까요?
160편에서 “명상은 마음과 영의 접촉을 이룬다.; 이완은 영적 감수성을 위한 능력을 결정한다.”라고 합니다. 명상을 통하여 우리네 마음이 靈과 접촉을 이룰 수 있고, 명상을 통하여 이완된 마음은 영적 감수성이 고양되며, 이런 명상과 이완의 반복적 수련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숙된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과 확고한 도덕적 의식이 성립되어야 진실한 믿음이 생기고, 삶을 통한 이런 진실한 믿음의 실제적인 이행에서 사람은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80편에서; “신성한 진리는 靈의-인식이며 살아있는 실재다. 진리는 神性에 대한 깨달음과 神과의 교제에 대한 의식의 높은 영적 차원들에서만 존재한다. 너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너희는 혼속에서 진리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고 마음속에서 진리의 교화의 특권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진리를 인간 행동의 공식, 규칙, 신조(信條) 또는 지적 패턴들로 가둘 수 없다. 너희가 신성한 진리의 인간적 형식화를 기도할 때, 진리는 급속히 죽는다. 구속된 진리의 사후의 구조는 기껏해야 지식화 되어 美化된 지혜의 괴상한 형태로 현실화 되는 것이 고작이다. 정지(停止)상태의 진리는 죽은 진리이다, 그리고 오직 죽은 진리만이 이론으로 유지될 수 있다. 살아있는 진리는 역동적이며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인간 마음속에서 체험적 실재를 누릴 수 있다.”
진리는 神性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神性에 대한 깨달음과 神과의 교제에 대한 의식의 높은 영적 차원들에서만 존재하며, 진리가 인간의 물질적 마음으로 한정하고 규제한 과학적 가설이나 종교적 교리로 얽매일 때는 그 생명력은 사라지고 앙상한 유골뿐인 죽은 진리라는 거지요. 이렇게 형해(形骸)화 된 진리는 知的으로 美化된 교리나 또 다른 이상한 형태의 신조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위의 본문에서 “정지(停止)상태의 진리는 죽은 진리다, 그리고 오직 죽은 진리만이 이론으로 유지될 수 있다. 살아있는 진리는 역동적이며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인간 마음속에서 체험적 실재를 누릴 수 있다.”라고 합니다. 진리는 내주하는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며, 진화의 모든 과정들을 통하여 완전한 神性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거지요. 본문에서 “너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되뇌는 진리는 정말로 살아있는 진리일까요?
어느 선사(禪師)는 “종교는 비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인 것에 의한 것이고 비논리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논리는 종교를 담을 수 없다. 논리는 너무 협소하다. 종교는 존재의 넓은 하늘이고 논리는 아주 조그마한 인간의 현상이다. 마음을 넘어가야 비로소 인간은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죽은 진리에 대해서 34편에서는 “비록 최고의 종교적 교리들이라도 죽은 이론은 인간 성격을 변환시키거나 인간의 행동을 조정할 힘이 없다. 오늘의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너희들의 옛날의 선생이 선언했던 진리이다: ‘말에 있지 않고 오직 힘과 성령 안에 있다.’, 신성한 靈이 진리의 형상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정의의 법칙들을 소생시킬 때까지는 이론적인 진리의 씨는 죽었고, 고귀한 도덕적 개념들은 효력이 없다.”라고 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진리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힘과 성령 안에 있다.”고 하며, “신성한 靈이 진리의 형상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정의의 법칙들을 소생시킨다.”고 합니다. 여기서 힘(power)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힘과 성령이 말이나 글로서 형해(形骸)화된 진리의 죽은 형상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정의(正義)의 법칙들을 소생시킨다는 것일까요?
장자(莊子)에 제환공과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의 우화가 있지요. 제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깎던 노인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제환공이 “성인의 말씀이다.”라는 대답에 노인이 엉뚱한 말을 하지요. “성인이 남긴 찌꺼기군요.” 제환공이 호통을 치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대답이 “제가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지고 덜 깎으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바퀴를 깎는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알 뿐 말로는 전할 수가 없어서 자식에게도 지금까지 가르쳐 주지 못해 이 나이까지 제 손으로 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성인들이 깨우치신 것들의 진수도 말로는 전할 수가 없으니 지금 읽고 계신 성인들의 말씀도 그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가 아니겠습니까?”
160편에 그리스의 철학자인 로단이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숙을 향한 노력은 일이 필요하며, 일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 너희들의 주(主)를 바라보라.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언덕에 오르셔서 힘을 취하고 계시다. 이 모든 문제의 비밀은 영적 교제, 경배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연합된 명상과 이완의 문제다. 명상은 마음과 영의 접촉을 이룬다.; 이완은 영적 감수성의 수용능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함 대신에 강함으로, 두려움 대신에 용기로, 자아의 마음 대신에 神의 의지로의 이 상호교환이 경배를 이룬다.”
명상을 통하여 삶의 세파에 시달리고, 각가지 욕망들로 출렁거리며 엉클어졌던 마음의 결이 가지런해지면 영적 감수성이 고양되고, 마치 물결이 잔잔해진 고요한 수면에 밝은 달이 환하게 비치듯이, 그동안 감추어져있던 내주하는 靈이 고요해진 마음에 비치고, 이렇게 드러난 靈과의 접촉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삶도 명상과 이완을 통한 靈과의 접촉으로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인 나약함과 삶에서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고, 인간이라는 우주의 어린아이의 차원에서 神性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하나씩 둘씩 밟아갔으며, 이렇게 얻게 되는 살아있는 힘은 형식화된 이론이나 교리의 틀 속에 묶여있는 죽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론과 교리의 틀에서 벗어난 진리가 인간의 삶 속에서 되살아나 진리의 체험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에서 '명상과 이완(Meditation and relaxation)'이라는 표현을 개인적으로는 ‘명상(冥想)과 안심(安心)’이라고 풀이합니다. 안심(安心)이란 불교용어로 명상을 통하여 잡다한 생각과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말하지요.
위의 본문에서 로단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예수가 명상과 이완을 통하여 내주하는 靈과의 교제를 통하여 삶에 필요한 힘을 취한다는 설명은 앞의 3장에서 살펴본 112편의 “마음이 실재(實在)를 그것의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물질은 물질적 분별들로 사라지지만, 아직 마음에는 실재적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적 통찰력으로 물질이 사라진 후 마음에 남아 있는 그 實在를 추적하고 그것을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그것은 마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靈의 통찰력은 아직도 ‘영-본성의 우주 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라는 전제(前提)를 인간 예수가 그의 실제적인 삶을 통하여 체현한 것이지요.
본문에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언덕에 오르셔서 힘을 취하고 계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동안’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앞에서 “진리는 말로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될 수 있다.”, “신성한 진리는 靈의-인식이며 살아있는 실재다.”, “정지(停止)상태의 진리는 죽은 진리이다, 그리고 오직 죽은 진리만이 이론으로 유지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동안’이란 우리들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즉 예수님이 언덕에 홀로 올라서 명상과 이완으로 살아있는 진리를 몸으로 체현하고 진리의 힘을 취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단지 그의 말씀을 기다리며 살아있는 진리를 말씀의 틀로 묶어 그 힘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佛家에서는 명상수련의 요체를 ‘지(止)와 관(觀)’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속제(俗諦)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진제(眞諦)의 관점에서 볼 때는 모두가 자성(自性)이 공(空)하며 단지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망념(妄念)으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진여일심(眞如一心)뿐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모든 망념(妄念)들은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을 지(止)라고 하며, 망령된 생각들이 사라진 고요하고 맑은 마음으로 세상의 만법(萬法)을 비추어 보는 것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색즉시공(色卽是空) - 색(色)이 공(空)하다는 것을 관찰함으로 지(止)수행이 이루어지고, 공즉시색(空卽是色) - 공(空)이 바로 색(色)이라는 것을 관찰함으로 관(觀)수행이 이루어지며, 이렇게 두 가지 수행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에 지관쌍수(止觀雙修)가 이루어져 내면의 진여일심인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이 궁극적 수행이라고 합니다. 고타마 싣달다가 출가하여 당시의 여러 종파들에서 가르침을 구하고 수년간의 고행을 했지만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명상에 들어가 진리의 눈을 떠서 스스로 부처(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하지요.
본문은 이어서 “그리고 약함 대신에 강함으로, 두려움 대신에 용기로, 자아의 마음 대신에 신의 의지로의 이 상호교환이 경배를 이룬다.”라고 합니다. 진정한 경배는 명상과 이완으로 靈과의 접촉을 통한 내재하는 神의 현존의식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강인함과 두려움으로 대치하고, 인간의 물질적 마음이 영적으로 전환되는 것이지, 종교적 의식에 따른 형식적인 절차나 절대자의 권능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190편에서도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하여 “그의 비할 데 없는 종교적 삶의 비밀은 이 神의 현존의식(現存意識)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성적인 기도와 진지한 경배─神과의 완전한 교제─에 의하여 달성했으며, 지도(指導)나, 음성, 상상력 또는 비상한 종교적 수행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명상과 이완’을 통한 靈과의 접촉은 물질적 마음을 영적으로 전환시키며, 이렇게 영적으로 전환된 마음으로 드리는 지성적인 기도와 진지한 경배로 神과의 완전한 교제를 이룸으로서 神의 현존(現存)과 神에 대한 믿음이 그의 삶을 이끈 것이지, 다른 어떤 지도(指導)나, 다른 사람의 설교, 또는 개인적인 상상력, 그리고 예외적인 종교적 수행을 통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佛家에서 “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일체법 즉심자성 성취혜신 불유타오). 일체 법이 자신의 마음 자체인 줄 알아서 지혜의 몸을 이루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인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 자체(心自性)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佛性을 뜻하는 것으로, “일체법이 자신의 마음 자체인 佛性에서 비롯한 것인 줄 알아 지혜의 몸을 이루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도 앞에서 “인간 예수도 내재하는 神의 현존의식과 神과의 완전한 교제로 그의 종교적 삶을 이루었지 다른 지도(指導)나, 음성, 상상력 또는 비상한 종교적 수행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와 서로 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神과의 완전한 교제를 이룬 것이나, 佛家에서 일체법이 佛性의 현현(顯現)인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진리의 문에 들어선 경우에 가능한 일이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물질적 육신과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리로 나아가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보통사람들은 위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글로 쓰여 진 경전이나 선각자의 가르침 등이 그 자체로서는 비록 진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진리로 나아가는 길의 이정표이기에, 이정표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한걸음씩 내딛는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神의 발견과 자아-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한 고비 돌아서면 또 다른 갈림길이 나오고 이정표의 알기 힘든 기호들을 제대로 판독하고 바른 길을 찾아간다는 것도 쉬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한편, 앞글에서 인용한 196편의 “실재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는 神에께 접근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神의 발견, 실재와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은 자아-완성, 즉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총체성을 체험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총체적 실재의 체험은 神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 神을 아는 체험의 종국(終局)이다.”라는 기술에서 “神의 발견, 실재와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은 자아-완성, 즉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총체성을 체험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의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위의 본문은 한마디로 ‘진리는 神의 발견이고 神의 발견은 자아의 완성’이라고 줄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112편의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물질적 몸과 마음의 작용이 모두 사라진 후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참 자아는 내재하는 ‘영-본성’이 부분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3장에서 인용한 “유란시아의 인간들에게 증여된 ‘영-본성’의 전형은 자아-표현 또는 인격-실현에 일곱 차원들의 잠재성이 있다. 이들 차원의 현상들은 유한 차원에서 셋으로, 亞-절대차원에서 셋으로, 그리고 절대차원에서 하나로 실현될 수 있다.”라는 기술처럼 절대차원에서 완전하게 발현된 ‘영-본성’은 일상무상(一相無相)으로 정체성이 없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196편에서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단계인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총체성의 체험’은 역설적으로 자아의 정체성이 무한으로 확장되어 정체성이라는 의미마저 사라진 절대차원에서 ‘무아(無我)의 체험’과 같은 의미로, 개별적인 자아는 진화의 긴 여정 끝에 無我의 체험을 통하여 神과의 합일로 자아의 완성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佛家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가 사람에게 설법하는 것은 설법하는 부처와 듣는 사람이라는 두 주체간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부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에게 설법하고, 부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설법을 듣는 것으로 예불(禮佛)과 기도도 다름이 없으며, 부처와 인간이 서로 포섭하고 포섭되는 다중의 관계라고 합니다. 16편에서 “우리가 神을 예배하는 것은 첫째는 神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다음에는 神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神안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神에게 기도하는 것은 저 멀리 낙원에 있는 神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도는 神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사람 속에 있는 神에게 기도하며, 사람 속에 있는 神이 神속에 존재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과 신의 의지의 상호 포섭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0편에서는 이어서 “이런 체험들이 자주 반복되면, 이 체험들은 힘을 주고 그리고 경건한 습관들로 구체화되며, 그러한 습관들은 결국에는 영적 특성을 형성하고, 그런 특성은 동료들에 의해 성숙한 인격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실행들은 처음에는 어렵고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습관적이 되면, 곧 편안해지고 시간이 적게 든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질수록, 그리고 문명의 유혹이 배가될수록, 神을-아는 개인들이 그들의 영적 에너지들을 보호하고 증가시키도록 설계된 이런 방어적(防禦的)인 습관적 실행들에 익숙해질 필요가 더욱 다급해지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명의 유혹이 배가될수록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에너지를 보호하고 그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명상이 필요하지만, 참된 명상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어느 명상 수행자는 그 과정을 처음에는 여름철 우기에 비구름이 끊임없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듯이, 명상을 하려고 조용히 앉아있으면 갖가지 생각과 잡념들이 끝없이 몰려와서 내면의 순수한 의식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몰려오는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잡념을 불러들여 더욱더 내면을 가릴 뿐으로 어떤 의식적인 시도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먹구름이 몰려오는 와중에서도 구름과 구름사이의 틈새로 파란 하늘을 잠깐씩 볼 수 있듯이, 몰려오는 생각과 생각의 틈새로 고요한 내면이 스치듯 나타날 때에 의식을 집중하라고 합니다. 이런 수행이 반복되면 점차적으로 생각과 생각사이의 틈새가 넓어지고 감추어져있던 내면의 순수한 의식이 점점 드러나게 되고, 이런 수련의 과정을 통하여 갖가지 잡념과 망상으로 얼룩졌던 마음이 점차적으로 정화되며 내면의 순수한 의식이 확장되며, 이렇게 확장되는 순수의식을 통하여 내재하는 神과의 교통과, 사람의 물질적 마음이 神의 의지로의 점진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며, 개인의 영적 특성이 형성된다는 거지요.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