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3)
2편에서; “모든 유한한 지식과 피조물의 이해는 상대적이다. 비록 높은 출처들에 수집된 정보와 소식도 단지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국부적(局部的)으로 정확하며, 개인적으로 진실하다.”, “물리적 사실들은 상당히 획일적이지만,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서 살아있고 유연한 인자(因子)이다. 진화하는 존재들은 그들 간의 관계에서 단지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진실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 미치는 한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언뜻 보기에 전적으로 진실해 보이는 것이 창조의 다른 부분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진실할 뿐이다.”, “신성한 진리, 궁극적 진리는 한결같고 보편적이지만,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영역들의 출신인 수많은 개체들이 말한 것으로, 때로는 지식의 완전함 그리고 개인적 경험의 충만함과 또한 그 경험의 장단과 범위에서의 이 상대성 때문에 때로는 세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유란시아 書’는 여러 계층의 하늘 존재들로부터 수집된 방대한 정보와 소식들로 구성되었고,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하늘 존재들이 진술한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 출처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비록 높은 출처들에 수집된 정보와 소식도 단지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국부적(局部的)으로 정확하며, 개인적으로 진실하다.”고 합니다. 책에 기술된 영적인 이야기들의 진술자인 하늘존재들도 우주의 다른 차원들에 존재하는 유한한 중간자들로 그들이 처한 차원에 따라 각각의 영적수준과 체험에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진술한 내용들도 진술자들의 개별적 입장에서는 진실하다고 할 수 있어도, 영역을 달리하는 다른 차원에는 볼 때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서문을 진술한 ‘오르본톤’의 신성한 카운슬러도 진리-계시단(啓示團)의 허락을 받아 서문을 기술했으며, 책의 각 편을 진술한 하늘존재들도 그들의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진리는 우주의 철학에서 살아있고 유연한 인자(因子)이다. 진화하는 존재들은 그들 간의 관계에서 단지 부분적으로 현명하고 상대적으로 진실하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 미치는 한에서만 확신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진리는 말로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될 수 있다.”라는 기술처럼 진리는 말이나 글로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인 삶의 경험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가변적인 因子로, 우주의 다른 차원들에 존재하는 차등적인 하늘존재들에서만이 아니라, 동일한 영역에서 진화하는 개체들 사이에도 개개인의 영적수준과 체험의 차이에 따라 그들이 인식하는 진리에도 다양한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한 장소에서 언뜻 보기에 전적으로 진실해 보이는 것이 창조의 다른 부분에서는 오직 상대적으로 진실할 뿐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상대적인 관계를 莊子는 제물론의 우화 속에서 ‘왕예’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쉽게 풀이합니다.;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실은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습한데서 자면 허리에 병이 생겨 반신불수로 죽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위에 있으면 무서워하지만 원숭이도 그렇던가. 이들 셋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다. 이 넷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미인이라고 하는 ‘여희’를 보면 미꾸라지는 물속으로 숨고, 새가 그녀를 보면 날아가 버리고, 순록이 그녀를 보면 부리나케 달아나 버린다. 이 넷 중에 어느 쪽이 세상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고 하겠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신성한 진리, 궁극적 진리는 한결같고 보편적이지만”이라는 구절은 절대차원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일상무상(一相無相)’의 궁극적 진리로, 이어지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한 영역들의 출신인 수많은 개체들이 말한 것으로, 때로는 지식의 완전함 그리고 개인적 경험의 충만함과 또한 그 경험의 장단과 범위에서의 이 상대성 때문에 때로는 세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라는 유한 차원들에서의 상대적 진리와 대비를 이룹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118편에서 “神들은 영원 속에서 하나의 체험으로 시간에 관계된다. 진화의 우주들에서 영원은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현세의 영원함-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했습니다. 神의 발견인 진리는 과거의 먼 옛날이나, 영원한 미래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의 이 자리에서 깨달아야하는 현재형이며, 현재의 삶이라는 광산에서 찾아낸 진리의 광맥이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진리의 전부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삶이라는 진리의 광산에서 우리가 채광에 사용하는 도구가 너무 형편없어서 무진장으로 묻혀있는 광맥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겨우 파내려가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莊子는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무딘 도구라도 계속해서 땅을 파면 진리의 광맥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48편에서 “영적인 진리는 너희가 그것을 사무치게 체험하기 전에는 인식할 수 없으며, 많은 진리들은 역경 속이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삶을 영위해가는 바탕으로, 가식(假飾)적인 삶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겠지요. 위의 본문은 올바른 삶의 기반인 영적진리는 사무치게 체험하기 전에는 인식할 수 없으며 역경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앞에서 “진리는 말로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동물적 기원으로부터 진화한 사람의 육체적 생존을 위한 물질적인 삶을 넘어, 165편에서 예수님이 그의 사도들에게 “무엇을 먹을지 또는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지 하는 세속적 삶의 것들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마라. 혼의 복지가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영적인 진보가 의복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가르침과 같이, 神에 대한 내적성찰의 삶으로 물질적 자아에 대한 집착의 극복을 필요로 하며, 이런 극복의 과정이 보통사람들에게는 역경과 고난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태생적으로 물질적 욕망의 동물인 사람이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영적진보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는 환희의 길이 아니라, 동물적 본성의 견고한 껍질을 벗겨내고 씻어내는 고통스럽고 힘든 淨化의 시련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160편에서 “자아의 마음 대신에 신의 의지로의 이 상호교환이 경배를 이룬다.”는 기술도 ‘동물적 욕망의 淨化’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어떤 불교학자가 쓴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내부에 미립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원자는 원자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미립자를 묶어주는 강력한 결속력이 필요하듯이, 여러 가지 요소들의 합으로 구성되어있는 인간의 물질적 자아는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결합력이 필요하다. 이런 물질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풀어주면 그 안의 놀랄만한 에너지가 방출되며 이것이 깨달음을 이루게 한다.”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을 자신의 자아로 생각하는 전도된 ‘에고’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원자의 결속력에 비유한 것으로, 이런 집착의 고리가 끊어질 때 깨달음의 원자폭탄이 터진다는 겁니다.
어는 영적 수행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수행의 처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덮고 있는 갑갑하고 흉측한 껍질들을 벗겨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오랜 껍질들을 벗겨내는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그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마치 숨 막히는 밀실에서 벗어나 넓은 초원으로 한걸음씩 다가가는 해방감과 가슴속에 평화를 맛보기 시작했다.”
儒家에 “극기수요소제확청(克己須要掃除廓淸): 자신을 이기려면 속을 비워서 깨끗하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를 극복하고 진리(禮)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기(己)’라는 말도 자신의 ‘몸’ 또는 물질적 자아로, 자신의 물질적 자아를 극복해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앞에서 말하는 ‘동물적 욕망의 정화’와 같은 의미이지요.
103편에서; “사회적 또는 인종적 집단에서의 종교적 체험의 일관성(Unity)은 개인에 내주하는 神-단편(斷片)의 동일한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이타적 관심은 인간에 내재하는 이 神性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인격은 두 사람이 서로 같지 않고 독특하기에, 어떤 두 사람도 그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神性인 靈의 지도와 충동을 비슷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불가피하다. 사람의 집단은 영적 일관성(Unity)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결코 철학적 획일성(Uniformity)을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견해와 체험에 대한 해석의 이런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여 가지의 다른 정의들을 내렸다는 사실이 보여준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그에게 내주하는 神-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신성한 충동에 대한 그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따라서 그런 해석은 독특할 수밖에 없고, 다른 모든 사람의 종교적 철학과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靈的 일관성’과 ‘철학적 非획일성’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면, ‘靈的 일관성’은 靈과의 교감을 통한 행위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종교적 체험의 일관성(Unity)은 개인에 내주하는 神-단편(斷片)의 동일한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한 이타적 관심은 인간에 내재하는 이 神性에서 발원한다.”는 기술처럼 순수한 종교적 체험이나 참된 사랑인 이타적 관심은 사람에게 내주하는 神-단편(斷片)의 동일한 본성으로부터 기원하여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靈的 일관성’의 특성은 神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 평등과, ‘나’와 ‘나의 것’이라는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를 어우르고 포용하는 이타적 사랑의 실천이라는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서 사람의 마음에는 본성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사단(四端)이 있기에,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 중에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자동적인 발로로 누구나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철학적 非획일성’은 본문에서 “모든 사람은 그에게 내주하는 神-영으로부터 발산되는 신성한 충동에 대한 그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한다. 따라서 그런 해석은 독특할 수밖에 없고, 다른 모든 사람의 종교적 철학과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라는 기술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된 동일한 ‘神-단편(斷片)’의 평등과 이타적 사랑의 ‘영적충동’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적수준과 인식-프레임으로 해석하고 반응하며, 개개인의 차별적 인식의 바탕으로 삶과 세상을 탐구하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차별적인 평가에 기초한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과 같은 철학적 관점들은 사람들 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진화의 과정에 있는 모든 유한차원의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앞에서 인용한 180편에서 “너희는 진리를 인간 행동의 공식, 규칙, 신조(信條) 또는 지적 패턴들로 가둘 수 없다. 너희가 신성한 진리의 인간적 형식화를 기도할 때, 진리는 급속히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영적 관점’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포용하며 세속적인 차별상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반면에, ‘철학적 관점’은 사람의 주관적 견해와 경험에 기초하였기에 한정적이고, 특정한 사고와 견해의 틀에 묶여있습니다. 진리의 발견과 체험은 철학적 관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 관점의 성장에 달렸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집단은 영적 일관성(Unity)을 체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결코 철학적 획일성(Uniformity)을 이룰 수 없다.”라고 합니다. 여름 장마철에 잔뜩 찌푸린 날에도 잠깐씩은 구름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햇살이 비치듯이 일상의 잡다한 생각들과 욕망의 먹구름이 가득한 우리네 마음도 가끔은 是와 非의 갈등을 내려놓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가 있지요. 이렇게 잠깐씩 나타나는 아무런 편견이나 의도가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내면을 응접할 때 우리는 영적충동을 누구나 똑같이 감지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너’와 ‘나’로 구분되고, 善과 惡으로 갈라지며, 好와 不好의 차별이 생겨나고, 是와 非의 갈등이 연속되는 일상에는 모든 판단과 행위가 개개인의 주관적 관점에 기초함으로, 세속을 초월하여 차별 없이 작용하는 평등과 이타적인 사랑과 같은 영적 일관성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 간에 동일한 철학적 획일성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지요.
2편에서; “진리(眞)는 시종일관하며, 아름다움(美)은 매력적이고, 선(善)은 모든 것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실제적인 이러한 가치들이 개인의 체험에서 조화될 때, 결과는 지혜롭게 조절되고 성실로 검정된 사랑의 높은 차원이다.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어린아이가 그의 확장되는 체험이 인식할 더 큰 실재들과 더 나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실재는 인간 차원에서는 유한하고, 더 높고 신성한 차원들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앞에서 진리는 神性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문에서 神性은 피조물에게 眞, 美, 善으로 이해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현실의 삶 속에서 ‘에고’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고 극기의 경험들을 통하여 각자에게 체현되는 진리는 그 속에 眞, 美, 善의 실질적인 가치들이 조화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지혜와 성실을 겸비한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이라는 거지요. 神性에 대한 깨달음의 여정에서 높은 영적수준의 존재들이 체험하는 진리를 우리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유한한 인간 차원에서의 진리는 참된 사랑이라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마더 테레사는 “나는 한 번에 오직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꼭 한 사람, 한 사람씩만 그렇게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한 사람을 택했다. 아마 내가 그 한사람을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수 만 명도 택하지 못했으리라.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 그냥 시작하라. 하나씩, 하나씩.”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탐구는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실천은 어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이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어제나 내일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모든 우주 교육의 실제적인 목적은 세계들의 고립된 어린아이가 그의 확장되는 체험이 인식할 더 큰 실재들과 더 나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영적진화의 첫 번째 고리에 해당하는 우주의 미숙한 어린아이이기에, 책에 수록된 방대한 기술과 설명들은 우주의 미숙한 어린아이에게 앞으로 경험하게 될 우주의 실재에 대한 소식과 정보들을 알려주고, 본문에서 “실재는 인간 차원에서는 유한하고, 더 높고 신성한 차원들에서는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기술처럼 인간이 육신으로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유한한 실재들을 넘어 각각의 차상위 영역에 존재하는 하늘 존재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실상들을 예시함으로 앞으로 계속되는 긴 영적진화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영원하고 무한한 새로운 우주의 실상들을 보다 쉽게 근접할 수 있도록 인간이라는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거지요.
가르침, 즉 교(敎)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宗敎를 연상하지만, 종교라고 이름 할 수도 없는 수많은 가르침들도 있습니다. 꼭 경전을 보고 선각자의 가르침을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자연현상들도 열린 마음으로 관조(觀照)하면 마음의 자세에 따라 큰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禪門에는 깨달음에 이른 많은 禪師들의 일화가 전해옵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서도, 오래된 절집의 기와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서도, 스승의 한마디 一喝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냥 되는 일이겠습니까? 목숨을 건 오랜 수행의 결과가 어느 한 순간 작은 몸짓에 폭발하는 것이지요. 절집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부처의 현현(顯現)인데 다만 중생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하지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이 전해주는 수많은 가르침을 제대로만 받아드릴 수 있다면, 그 가르침들이 “敎熏心解性(교훈심해성) 性依敎熏(성의교훈) 以起解用(이기해용) 以解熏心行性(이해훈심행성) 性依解熏(성의해훈) 以起行用(이기행용) 以行熏心果性(이행훈심과성) 性依行熏(성의행훈) 起於果德(기어과덕)”이라고 합니다. “가르침이 마음의 바르게 이해하는 성품을 훈습하고, 이 성품은 가르침의 훈습에 따라 바르게 이해하는 작용이 일어나며, 바른 이해가 마음의 실천 수행하는 성품을 훈습하여, 이 성품은 바른 이해의 훈습에 따라 실천하는 작용이 일어나며, 실천 수행이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과덕의 성품을 훈습하여, 이 성품은 실천 수행의 훈습에 따라 공덕의 결과로 나타난다.”라고 풀이하지만, 짧게 줄이면 가르침(敎)과 가르침으로 인한 이해(解)와 그리고 그런 이해(解)의 실천수행(行)으로 얻게 되는 진리와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것이지요. 佛家에서는 이런 가르침(敎)과 이해(解), 그리고 실천(行)이라는 과정들을 통하여 現生에서도 부처와 같이 완전한 깨달음(진리)을 얻을 수도 있고, 수행자의 자질에 따라 또는 다른 이유로 現生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來生에서 깨달음의 궁극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는 계속된다고 합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