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13)   11-07-15
E.T   875
 

제 8장

삶과 죽음 (1)


오랜 장맛비 속에서도 창밖의 은행나무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생명력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푸른 잎은 오래지않아 노란색으로 갈아입고 내일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겠지만, 이어서 앙상한 나목으로 엄동의 혹한을 힘겹게 버티겠지요. 짙푸른 녹색의 은행잎과 마주보며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더듬어 봅니다.


39편에서; “필사자의 유년기(幼年期)의 영역인 유란시아에서 너희들의 짧은 머무름은 오직 우주들을 가로질러서 그리고 영원한 시대들을 통하여 뻗치는 긴 체인의 바로 첫 번째 하나의 고리이다, 너희들이 이 첫 번째의 삶에서 배우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삶을 살아가는 경험이다. 이 세상의 일은 비록 그것이 탁월하다고 해도,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만큼은 중요하지 않다. 올바른 삶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없다, 그러나 깊은 만족-성취에 대한 의식-이 있고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보상도 초월한다.”


오랜 기간의 진화과정을 거쳐 약 백만 년 전에 영장류로부터 돌연변이로 출현한 인간의 삶이란 무한하게 펼쳐지는 우주들을 가로지르는 긴 진화여정의 첫 번째 고리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너희들이 이 첫 번째의 삶에서 배우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초등학교에서도 한자와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틈만 나면 아빠에게 한자와 영어 시합을 하자고 덤벼듭니다. 나무 木, 물 水, 불 火, 라고 아들이 게임을 시작하면, 아빠는 tree, water라고 답을 하다가 ‘불’은 영어로 뭐지? 아빠는 모르겠는데 하면, 아들이 아빠!, ‘불’은 영어로 fire인데 그것도 몰라요? 라고 의기양양해집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의 배움은 어린이들에게는 앞으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초석으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또한 대단한 성취이지만,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이 세상의 일은 비록 그것이 탁월하다고 해도,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그 일을 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만큼은 중요하지 않다.”
라고 합니다. 진화의 첫 번째 고리인 사람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과 성과들이 비록 탁월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삶에서 일구어 내는 성과물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과정과 방법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109편에서
“삶의 큰 문제는 삶에서의 조상전래의 성향들을 신비 충고자의 신성한 현존으로 시작되는 영적충동의 요구들에 맞추는 일이다. 우주와 초우주 생애들에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유란시아에서 너희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득이 두 주인을 섬겨야만 한다. 사람은 오직 하나의 주인에게 영적으로 충실히 하면서, 사람은 계속적인 인간의 현세적 타협의 기술에 반드시 숙달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많은 망설임과 실패와, 진화적 갈등의 긴장에 지치고 굴복하는 이유이다.”라고 합니다.


인간은 물질적 육신과 마음으로 구성된
‘몸’과 神으로부터 증여된 ‘영적 실재’라는 두 가지의 주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인간의 삶에서 누구나 우선은 물질적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고 본능적으로 물질적 만족을 구하게 되지요. 佛家에서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인 탐(貪).진(瞋),치(癡)를 사람에게 가장 큰 세 가지 독(三毒)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가 탐심(貪心)으로 부(富), 권력, 명예 등을 지나치게 탐하는 물질적인 욕심이지요. 그러나 한편 인간에게 내재하는 영적 주체는 앞의 3장에서 인용한 112편의 “마음이 실재(實在)를 그것의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물질은 물질적 분별들로 사라지지만, 아직 마음에는 실재적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적 통찰력으로 물질이 사라진 후 마음에 남아 있는 그 實在를 추적하고 그것을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그것은 마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靈의 통찰력은 아직도 ‘영-본성의 우주 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라는 기술처럼 인간의 물질적 육신이나 마음의 현상들이 그 자성(自性)은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물질적 욕망을 초월한 우주의 영적 실재들을 추구함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은 이 두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갈등의 場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물질적 마음의 눈’‘영적으로 변화된 지성의 눈’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조화되고 동기화(同期化)될 때 실재의 세계가 드러난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며, 위의 본문에서도 “유란시아에서 너희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득이 두 주인을 섬겨야만 한다. 사람은 오직 하나의 주인에게 영적으로 충실히 하면서, 사람은 계속적인 인간의 현세적 타협의 기술에 반드시 숙달되어야만 한다.”라고 합니다.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은 물질적 욕망이나 영적충동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관점의 적절한 조화와 동기화가 이루어져야하며, 이렇게 두 관점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슬기로운 삶의 과정이 인간으로의 삶에서 얻는 성과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에서 “
우주와 초우주 생애들에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책에서 찾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의 구절을 “궁극적으로 우주에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실질적으로 초우주(Super Universe)에서는 진화하는 개체들이 영적존재로 변환되어 물질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에서 살아남는 ‘혼’이 맨션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모론시아 존재도 비록 인간의 ‘몸’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 이루어진 물질적 형상이 있음으로 물질적 주체와 영적 주체라는 이원성(二元性)을 가지고 있으며, ‘모론시아’의 삶에서도 물질적 주체와 영적 주체사이에 “진화적 갈등의 긴장”이 계속된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론시아’ 세계들에서 진화가 계속되고 이에 따라 개체들의 ‘몸’이라는 물질적 구성 요소들이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초우주(Super Universe)에서는 영적존재로 완전히 변환되기에 이런 진화적 갈등은 소멸된다는 것 같습니다. 초우주에서 진화하는 개체들이 영적존재로의 변환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편, “
올바른 삶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없다, 그러나 깊은 만족-성취에 대한 의식-이 있고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보상도 초월한다.”라고 합니다.


3편에서
“삶의 불확실성들과 존재의 성쇠(盛衰)는 神의 우주 주권의 개념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모든 진화하는 피조물의 삶에는 어떤 필연성들이 있다.”라고 하면서, 그 필연성들을 “용기, 이타주의(利他主義), 희망, 믿음, 진리에 대한 사랑, 이상주의(理想主義), 성실, 무사무욕(無私無慾), 기쁨” 등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우주 전체에 걸쳐 모든 단위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부분의 생존은 전체의 계획 그리고 목적과, 아버지의 신성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전심(專心)의 욕망과 완전한 의지와의 협동에 의존한다.”라고 합니다.


“삶의 불확실성들과 존재의 성쇠(盛衰)는 神의 우주 주권의 개념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5억여년 전에 최초의 생명 원형질이 지구의 바닷물에 심어진 이후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겨우 백만 년 전에 영장류로부터 돌연변이로 출현한 ‘안돈폰타’에게 ‘경배의 靈’‘지혜의 靈’이 증여됨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런 최초의 인간에게 다시 ‘영-본성’이 증여됨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인격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진화된 인간이 겪게 되는 삶의 불확실성과 질곡, 그리고 물질적 육신의 죽음, 등은 자연적 현상의 일환으로 神의 전체적인 우주계획과 목적에는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성쇠는 우주진화의 한 과정으로, 이런 진화의 과정들을 통하여 神의 우주계획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어서 “
모든 진화하는 피조물의 삶에는 어떤 필연성들이 있다.”라고 하면서, 그 필연성들을 ‘용기, 이타주의(利他主義), 희망, 믿음, 진리에 대한 사랑, 이상주의(理想主義), 성실, 무사무욕(無私無慾), 기쁨’이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에서 이런 필연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앞의 7장에서 살펴본 160편에서 “
명상은 마음과 영의 접촉을 이룬다.; 이완은 영적 감수성의 수용능력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함 대신에 강함으로, 두려움 대신에 용기로, 자아의 마음 대신에 신의 의지로의 이 상호교환이 경배를 이룬다.”라고 했습니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명상과 이완을 통하여 내재하는 靈과의 접촉으로 우주의 무한한 실재들과 관계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런 영적교감을 통하여 드러나는 神의 의지에 따라 인간의 물질적 마음이 정화됨으로, 삶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한계적인 삶에 대한 의미와 필연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런 삶의 의미와 필연성을 196편에서는 예수의 기도를 통하여
“그에게 기도는 영적 마음가짐의 진지한 표현, 혼의 성실함의 선언. 개인적 헌신의 고(告)함, 감사의 표현, 감정적 긴장의 회피, 갈등의 예방, 知性의 고양(高揚), 욕망의 高貴化, 도덕적 결정의 입증, 思考의 質의 향상, 보다 높은 성향의 고무(鼓舞), 추진력의 봉헌, 관점의 정화(淨化), 신앙의 고백, 의지의 선험적 굴복, 신뢰의 숭고한 단언, 용기의 묵시, 발견의 선언, 최고 헌신의 고백, 봉헌의 확인, 어려움의 조절기법, 그리고 이기심, 악, 죄를 향한 모든 인간적 성향들에 저항하는 연합된 혼의 힘들의 힘찬 동원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그렇게 신앙심 깊은 헌신의 삶을 사셨으며 바로 그런 기도와 함께 그의 삶을 의기양양하게 마치셨다.”라고 풀이해주 것 같습니다.


3편의 다른 장에서는
“피조물은 神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神또한 피조물 속에 살아있다.”, “神은 전체이며 그리고 神은 모든 것 속에 있다는 것이 글자그대로 사실이다.”라고 합니다. 기도문의 시작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동떨어져 저 멀리 낙원에서 홀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절대 존재로서의 神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어우르며, 모든 것에 수용되고, 모든 것에 평등하고 조화로운 神이 사람 속에 살아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필연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동물적 욕망과 참된 자아의 성숙을 향한 영적충동이 빚어내는 갈등과, 삶의 고비
마다 부딪치는 온갖 시련들을 극복하고 神의 우주 계획과 목적에 부합하는 올바른 삶에도 불구하고 어떤 물질적 보상이 따로 주어지는 것은 없으며, 인간으로서의 삶의 불확실성과 성쇠는 계속된다는 거지요. 그러나 내적성찰로 앞에서 언급된 “
용기, 이타주의(利他主義), 희망, 믿음, 진리에 대한 사랑, 이상주의(理想主義), 성실, 무사무욕(無私無慾), 기쁨”이라는 삶의 의미들과 필연성을 발견하고, 내재하는 神과의 영적교감으로 인간의 ‘물질적 마음’이 ‘신의 의지’로 점차적으로 바뀌어감으로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참된 가치의 성취에 대한 깊은 만족이 어떤 물질적 보상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현실적인 삶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절에서 드리는 기도와 예불의 주된 목적이 복(福)의 기원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변화된 지성의 눈을 뜨는 것이 어려운 일이며, 더 나아가서 ‘물질적 마음의 눈’‘영적으로 변화된 지성의 눈’의 조화는 더욱더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道)를 증득한 도인(道人)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의 사랑과 모든 제자들의 존경을 받던 수제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해서 스승은 제자들과 같이 문상을 갔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수제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스승은 목을 놓고 울었습니다. 문상을 마치고 나온 후에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은 불생불멸의 도(道)를 증득하시어 물질적인 삶과 죽음을 초월하셨다고 하였는데 제자의 죽음 앞에 대성통곡을 하신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스승님도 아직은 물질적인 삶과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요?’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세상을 떠난 아무개는 일시적인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신령스런 도(道)를 타고 천하에 아무런 걸림이 없는 자재함을 얻었으니 그 기쁨을 무엇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제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내 몸이 슬퍼하며 울음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앞에서 인용한 본문에서
“삶의 큰 문제는 삶에서의 조상전래의 성향들을 신비 충고자의 신성한 현존으로 시작되는 영적 충동의 요구들에 맞추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많은 망설임과 실패와, 진화적 갈등의 긴장에 지치고 굴복하는 이유이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내재하는 靈의 신성한 충동은 항상 평화롭게 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본성은 과거 지향적인 반면에 영적충동은 神을 향한 미래 지향적인 특성으로 이 두 가지 속성들 사이에 긴장이 초래되고, 이런 긴장이 사람을 지치게 하고 때로는 영적진화를 중도에 포기하게까지도 한다는 겁니다.


앞 장에서 소개한
“나는 수행의 처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덮고 있는 갑갑하고 흉측한 껍질들을 벗겨내는 일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오랜 껍질들을 벗겨내는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그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마치 숨 막히는 밀실에서 벗어나 넓은 초원으로 한걸음씩 다가가는 해방감과 가슴속에 평화를 맛보기 시작했다.”라는 어느 영적 수행자의 수기가 사람의 물질적 본능과 영적충동 간의 긴장을 쉽게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
우주 전체에 걸쳐 모든 단위는 전체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부분의 생존은 전체의 계획 그리고 목적과, 아버지의 신성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전심(專心)의 욕망과 완전한 의지와의 협동에 의존한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모두 우주의 실재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영-본성’의 발현인 개체들의 자아는 모두가 우주 유기체의 일부분으로 우주에서의 긴 진화과정에서 긴장과 갈등을 피하고, 내재하는 ‘영-본성’의 완전한 발현으로 神性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개체들의 자발적 의지와 신성한 뜻을 행하려는 욕망 그리고 神의 전체적인 우주계획 및 목적과의 협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112편에서; “죽음에서 살아남는 실재적인 어떤 것, 인간 진화의 어떤 것, 신비한 충고자에 추가적인 어떤 것이 있다. 새롭게 나타나는 이 존재는 혼이며, 이것은 너희의 물리적인 몸과 물질적인 마음 둘 모두의 죽음에서 생존한다. 이 존재는 신성한 ‘너’인 ‘조절자’와 연결된 인간인 ‘너’의 삶과 노력들이 결합된 공동의 자녀이다. 인간과 신성한 가문의 이 자녀는 지구 기원의 살아남는 요소가 된다.; 그것은 모론시아 자아, 불멸의 혼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인 유란시아는 ‘
필사자의 유년기(幼年期)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단계인 모론시아 세계는 ‘필사자의 청소년기의 영역’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질적 육신의 몸으로 태어난 인간은 자연의 순환법칙에 따라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적 죽음으로 인간의 참 자아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위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서 살아남는 실재적인 어떤 것, 인간 진화의 어떤 것, 신비한 충고자에 추가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겁니다. 육신의 삶 동안에 “신성한 ‘너’인 ‘조절자’와 연결된 인간인 ‘너’의 삶과 노력들이 결합된 공동의 자녀”인 ‘불멸의 혼’이 창조되고, 이 불멸의 혼을 통하여 인간의 자아는 지속되며, 이 ‘혼’은 진화의 다음 단계인 초기 모론시아 존재의 자아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혼’, 또는 ‘영혼’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영혼’이나 우리네 전래의 ‘혼’과는 다른 ‘유란시아 書’의 독특한 개념으로 이어지는 다음 글에서 ‘혼’이라는 중간자(中間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봅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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