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3)   11-05-10
E.T   1,630
 

앞의 본문에 나오는 ‘모론시아’‘모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책의 48편에 있지만, 그 개념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모론시아(Morontia): “神들은 거친 동물적 본성의 피조물들을 창조적 마술의 어떤 신비로운 행위로 완전한 靈으로 바꿀 수 없으며─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조물주들이 완전한 존재들을 만들기를 원할 때, 그들은 직접적인 고유의 창조로 그렇게 하지만, 그들은 동물-기원의 물질적 피조물들을 한 번의 조치로 완전한 존재로 바꾸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모론시아 삶은, 지역우주 생애의 다양한 단계들에 뻗쳐있으며, 물질적 인간들이 靈-세계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접근이다. 무슨 마술이 물질적 육체의 자연적 소멸인 죽음에 소멸될 수밖에 없는 물질적 마음을 불멸의 완성된 靈으로 바로 바꿀 수 있는 그런 한 번의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그런 믿음들은 무지한 미신들이며 기분 좋게 하는 우화들일 뿐이다.”라고 기술합니다. 즉 ‘모론시아’는 물질적 인간이 죽음을 넘어 절대단계의 완전한 靈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중간과정들의 영역으로, 이 영역에 존재하는 무수한 중간자적 개체들을 ‘모론시아’ 존재라고 합니다.

모타(Mota): “모론시아 모타의 낮은 수준들은 인간의 철학의 높은 차원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첫 번째 맨션세계에서는 병렬의 수법으로 덜 진보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관례이다.; 그것은 한 줄에는 모타 의미들의 더 단순한 개념들을 제시하고, 맞은편 줄의 인용문은 인간의 철학과 유사한 서술들로 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인간 세상의 철학처럼 ‘모론시아’ 세상에서 발전된 또 다른 차원의 철학이나 학문체계를 ‘모타(Mota)’라고 지칭하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모론시아 차원에서 이 모든 확대된 차원의 체험들은 모타의 영향을 통하여 그리고 모론시아 數學의 기여로 最高 차원 또는 Personality 차원들과 놀랍게 이어진다.”라고 합니다. 인간세계를 넘어 모론시아 차원들에서의 진화과정을 통하여 상위의 영적차원들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모론시아’의 여러 단계들에서 발전되고 심화되는 ‘모타’와 모론시아 수학(數學)에 의하여 진화하는 개체들이 우주실재에 대한 확장된 인식과 체험들을 습득한 결과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모론시아 수학(數學)’이라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수학은 수(數)와 양(量)에 대한 학문으로 다른 학문들의 기초가 되며 인류의 가장 오래된 학문으로, 인간의 사유(思惟)에 의하여 구성된 추상적인 과학이며, 수학은 그 본질적인 추상성(抽象性) 때문에 전제로 삼은 공리에 구체적인 현상을 적용시키면 이 공리에서 이끌어낸 결론이 그 구체적인 현상을 선명하게 해명해 주는 것으로, 수학을 ‘과학의 언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론시아 수학(數學)’이란 앞에서의 ‘모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의 경계를 초월하여 모론시아 세계에서 우주의 실상에 대하여 더욱 발전되고 심화된 학문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주의 실재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 무지(無知)인 것 같습니다. 앞장에서 언급한 111편의 ‘생각 조절자’가 내주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원인도 바로 인간의 상대적 무지(無知)로, ‘생각 조절자’의 영적인 지도와 안내에 동물적 본성의 인간이 상응할 수 없기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불가(佛家)에서 우주의 모든 중생들이 윤회하는 근본원리를 연기(緣起)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 연기(緣起)의 시작이 우주의 이법(理法)에 대한 무명(無明) 또는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의 기본교의인 연기(緣起)는 불교수행의 모든 것이 무명(無明)의 타파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인간의 Personality에 대한 그들의 연구에서 인간들이 경험한 많은 문제는 경험적인 Personality의 이해에서 차원적인 수준들과 영적 수준들이 同位가 아니라는 것을 유한 피조물이 기억한다면 피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유란시아 書’의 새로운 개념들 중에서 가장 이견(異見)이 분분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Personality’에 대한 이해일 것 같습니다. 이런 異見들이 발생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구분해보면;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우주의 의미를 상징하는 X축, 우주의 가치를 상징하는 Y축, 그리고 우주에 대한 통찰력을 상징하는 Z축을 기반으로 사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Personality’에 대한 인식-프레임의 크기와 형태가 개인별로 모두 다르기에 인식 수준의 차이가 있으며,


둘째는 ‘Personality’의 실제(實際)를 감지하는 영적 수준들이 개인별로 모두 다르고 같지 않기 때문이고,


셋째는 사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 수준과 ‘Personality’를 감지할 수 있는 영적 수준이 동위(同位)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식-프레임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낮은 영적수준으로 감지된 ‘Personality’의 범주가 작다면, 그 사람의 ‘Personality’에 대한 경험적 이해는 인식-프레임이 비록 크지만 낮은 영적수준으로 감지된 ‘Personality’의 범주 만큼일 뿐이고, 또한 높은 영적수준으로 감지할 수 있는 ‘Personality’의 범주가 크다고 하더라도 인식-프레임이 작다면 비록 높은 영적 수준으로 감지된 ‘Personality’의 범주가 크다고 해도 작은 인식-프레임의 크기만큼이 그 사람의 경험적 이해가 되는 것이지요.


‘Personality’에 대한 개인의 경험적 이해에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神으로부터 증여된 ‘Personality’ 자체이며, 둘째는 내재하는 ‘Personality’를 감지할 수 있는 개개인의 영적 감수성이고, 셋째는 이렇게 감지된 ‘Personality’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식-프레임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증여된 동일한 ‘Personality’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개인의 차별적인 영적 수준으로 감지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으며. 또한 사람마다 차등적인 인식 수준에 따라 개인적인 이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實際)로서의 ‘Personality’를 바다에 비유하면, 개개인의 인식-프레임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식-프레임이라는 그릇에 담긴 바닷물은 영적 감수성으로 감지된 ‘Personality’의 부분적인 ‘콘텐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유란시아 書’의 독자들은 병역의무는 거의 모두가 마쳤을 것 같습니다. 군대 용어에 첩보와 정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첩보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나 형편을 말하는 반면에, 정보는 이렇게 수집한 첩보를 분석하고 평가하여 목표로 하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말합니다. 그래서 첩보 보다는 정보를 신뢰하지요. ‘영적 감수성’의 ‘Personality’에 대한 感知를 첩보라고다면, ‘인식-프레임‘에 의한 ’Personality'에 대한 이해는 개개인의 다양한 분석과 평가에 의한 정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석과 평가의 토대가 되는 자료나 기법에 차이가 있을 경우는 첩보의 의미들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또는 놓쳐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에서의 본문 중
“유란시아 필사자들에게 증여된 ‘Personality’의 전형은 자아-표현 또는 인격-실현에 일곱 차원들의 잠재성이 있다.”라는 구절을 되돌아보면, X, Y, Z축으로 구성되어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계속 크기가 확장되는 인식-프레임은 그 자제로서는 ‘Personality’가 아닙니다. 神으로부터 증여된 우주의 실제로서의 ‘Personality’는 각 개체의 영적능력에 따라 상응하는 정도로 감지되고, 그렇게 감지된 만큼의 ‘Personality’가 각 개체들의 다양한 인식-프레임을 통하여 자아로 표현되고 인격으로 실현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식-프레임의 확장과 영적 수준의 향상을 위해서 책에서도 진화의 전(全)과정에 걸쳐 끊임없는 학습과 수행을 강조하고 있으며, 각각의 진화단계별로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는 수많은 시스템과 하늘존재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식-프레임의 수준과 영적 수준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며, 또한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동위(同位)에 있지 않기 때문에 ‘Personality’에 대한 경험적 이해에는 많은 이견(異見)과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 간의 이런 구조적 차이를 이해한다면 서로간의 異見에 의한 문제들을 피해갈 수 있다는 거지요.


책에서 말하고 있는 진화의 모든 과정은 유한한 존재들의 제한된 인식과 영적 수준을 향상시켜 내재하는 ‘Personality’의 영원하고 불변한 실상의 추구에 있으며, 이렇게 진화하는 개체들이 절대차원에 도달하면 인식과 영적 수준이 무한에 이르러 온전한 ‘Personality’의 실상이 현현(顯現)되며,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해탈은 끊임없는 윤회과정에서 수행을 통하여 무명의 장막을 걷어내고 내재하는 불성(佛性)을 발견하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으로, 비록 그 개념들과 표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란시아 書’나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우리네 삶의 지향점은 같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정말로 유기체(자아)[organism(selfhood)]와 그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Personality’는 이 유기체와 환경의 연합에 정체성의 가치와 연속성의 의미들을 준다. 이렇게 ‘Personality’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의 요소로 작용함으로 자극-반응의 현상이 단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계장치들은 태생적으로 수동적이며; 유기체들은 선천적으로 능동적이라는 것은 항상 진실이다.”


위의 본문에서
“삶은 유기체(자아)와 그 환경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이며, 이런 과정에서 유기체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Personality'이다.”라고 했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유기체(자아)’에서 (자아)를 빼고 유기체’라고만 했을 경우는 어떨까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는 7년을 주기로 완전히 새로운 세포들로 대치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기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생명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바뀌어 간다면 그 유기체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어디에 기초할 수 있을까요?


앞장에서 인용한 본문에서 “
진화적 성장의 이 모든 연속적인 일생들과 단계들에 두루 너희들에게 전혀 변화되지 않는 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은 변화에 직면하여 불변인 ‘Personality'이다.”라는 설명처럼 유기체의 구성 요소들이 환경과의 끊임없는 반응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지만 인간을 포함하여 마음이나 靈을 가진 생명체들에게는 불변의 ‘Personality'가 내주하며, 이 ‘Personality’에 의해서 인간은 자아 또는 인격이라는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며 또한 다른 생명체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자아나 存在-格을 가지게 됨으로, 환경과의 연속되는 자극과 반응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독립된 존재로서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Personality'가 내주하는 유기체(자아)의 환경과의 반응은 단순하게 수동적으로 기계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의 차원에서 ’Personality'는 縱으로는 공간을 통하여 시간에 따른 이동인 진보의 방향과 본질인 진화를 나타낸다.”라는 앞 장에서의 설명처럼, 'Personality'는 내주하는 유기체(자아)가 환경과의 반응에서 진화의 본질과 방향성에 상응(相應)하도록 능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자아와 환경이 의미 있는 접촉을 이루는 것은 마음의 중재를 통해서이다. 유기체가 환경과의 그렇게 중요한 접촉들을(충동에 대한 반응) 이루는 능력과 의지는 온전한 'Personality'의 태도를 나타낸다.”
라는 기술도 앞에서의 이야기를 부연한 것으로, 유기체가 환경과의 접촉으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자아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이룰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환경과의 끊임없는 접촉들이 진화의 본질과 방향성에 부합하는 것은 마음의 중재를 통한 ‘Personality’의 능동적 작용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112편은 이어서 “인간의 유기체에서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合이 자아(自我)─개체성─를 이루지만, 그런 과정은 우주의 실재들과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Personality'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합니다.


위의
“인간의 유기체에서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합(合)이 자아─개체성-를 이룬다.”는 구절에서 ‘자아-개체성’이라는 개념은 앞의 본문에서 말하는 'Personality'의 발현으로 표현되는 ‘유기체의 자아’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자아 또는 자신의 개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기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생물학에서는 유기체를 “동물, 식물, 균류 또는 미생물처럼 살아있는 생체를 말하며, 어떤 형상을 가지며 자극에 반응하고, 재생산, 성장, 발전 그리고 안정된 전체로서 여러 가지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생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루어진 몸을 자신의 개체성이며 自我라고 생각하지만, 책의 58편에
“새로운 種들과 다양한 계층들의 생명 유기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전적으로 생물학적이며, 순전히 자연적이다. 이런 발생적 돌연변이들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라는 기술처럼 이렇게 유기체를 이루는 여러 부분들의 합성과정과 새로운 種의 출현은 생물학적인 자연현상으로, 우주의 실제(實際)인 ‘Personality’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Personality'의 발현으로 표현된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우주의 실재(實在)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유기체로서의 사람의 ’몸‘ 자체는 우주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탁발원 11-05-12
 
유란시아서는 불교에 없었던 개념이 많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아마 퍼서낼러티가 가장 가장 생소한 개념일겁니다.
웬만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대단한 모험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글을 대하니 자극도 되고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생각조절자가 불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글이 기억나는데, 퍼서낼러티는 불교가 받아들여야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남겨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로 인한 극심한 혼란은 어쩔 수없이 극복해야할 자기초월의 또 다른 역설을 만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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