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9)   11-06-04
E.T   1,291
 

책의 서문에서 “신성(神性)은 피조물에게 眞, 美, 그리고 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격에서는 사랑, 자비, 그리고 봉사와 서로 관련된다.; 비인격적 차원들에서는 정의, 힘(일률, 一率), 그리고 주권으로 나타난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인식한 ‘영-본성’은 인격으로 실현되며, 내재하는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은 그렇게 실현된 사람의 인격에서 사랑, 자비, 그리고 봉사로 표현된다는 거지요. 앞에서 “그것은 神의 의지를 행하는 것에 자유의지를 바치는 것으로 신에게 선물을 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다시 바꾸어 쓰면 “‘영-본성’은 유한한 존재인 사람의 자아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다하여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봉사함으로 神과의 유일한 관계인 사랑의 고리가 연결되고, 이런 사랑과 자비와 봉사를 통하여 神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神에게 선물을 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神을 믿는다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神을 믿는다는 증거다. 아무리 神을 믿는다고 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神을 믿는 것이 아니다. 겨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神을 아주 조금만 믿는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神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증거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우주의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神을 완전히 믿는다는 증거다.”

절집의 華嚴經(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諸佛如來 以大悲心而爲體故 因於衆生而起大悲 因於大悲生菩提心 因菩提心成等正覺 譬如曠野沙?之中 有大樹王 若根得水 枝葉華果 悉皆繁茂 生死曠野 菩提樹王 亦復如是 一切衆生 而爲樹根 諸佛菩薩 而爲華果 以大悲水饒益衆生 則能成就阿縟多羅三?三菩提故 (제불여래 이대비심이위체고 인어중생이기대비 인어대비생보리심 인보리심성등정각 비여광야사적지중 유대수왕 약근득수 지엽화과 실개번무 생사광야 보리수왕 역부여시 일체중생 이위수근 제불보살 이위화과 이대비수요익중생 즉능성취아뇩다라삼막삼보리고)”. 우리말로는 “모든 부처와 여래는 큰 자비심을 근본으로 한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중생으로 인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큰 자비심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며, 보리심으로 인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하면 모래와 자갈의 광야에 있는 큰 나무가 물을 얻게 되면 가지와 잎, 꽃과 열매가 모두 무성하듯이, 태어남과 죽음이 되풀이는 삶의 벌판에 서있는 깨달음의 나무(菩提樹王)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나무뿌리로 삼고 모든 부처와 보살을 꽃과 열매로 삼으니, 큰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익되게하면 지혜의 꽃과 열매를 성취할 수 있다.”라고 풀이하지요.

본문은 이어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인 도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행위 차원들을 식별하며 선택적으로 그것들 사이에 차이를 나타낸다.”라고 합니다.


도덕의 일반적인 정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등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라고 합니다.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 개념이기에 도덕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101편에서는 사람의 도덕적 의식을
“개화된 사람의 진보한 영적 의식은 어떤 특정한 지적 믿음 또는 어떤 하나의 특별한 삶의 방식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삶에 대한 진리의 발견에, 필사의 존재가 당면한 계속 순환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역량에 관심을 둔다. 도덕적 의식은 사람이 매일 매일의 행동에 대한 통제와 지침으로 지키도록 의무로서 요구하는 이런 윤리적, 그리고 새롭게 생겨나는 모론시아적 가치들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자각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길게 풀이합니다.


앞의 3장에서 인용한 본문의
“삶은 유기체(자아)와 그 환경사이에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라는 기술을 좀 더 부연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의지해서 우리의 개인적 삶을 재생산하며 서로 얽혀있는 사회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갑니다. 우리의 몸인 유기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적 세계와 끊임없는 물질대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재하는 ‘영-본성’과의 교통이 단절 없이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네 삶에서 당면하는 모든 질곡과 갈등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며 이런 문제들의 해결도 세상과의 관계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순환적으로 계속되는 관계들에 공정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윤리적인 기준,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진화의 큰 틀에서 현생의 삶을 넘어 미래의 모론시아 존재로서의 삶의 가치들에 합당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 규범을 도덕이라고 하며, 이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자각을 도덕심이라고 하고, 이런 도덕과 도덕심의 바탕이 사람에 내주하는 ‘영-본성’에 있다는 겁니다.


“神性은 비인격적 차원들에서는 정의, 힘(일률, 一率), 그리고 주권으로 나타난다.”
라는 서문의 기술에서, ‘정의’는 고정된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인용한 101편에서 말하는 “계속 순환되는 상황들에 대처하는 공정하고 올바른 역량”을 의미하며, ‘힘(일률, 一率)’ 현재의 삶 속에서만 작용하는 현시적인 힘이 아니라 모론시아적 가치들까지도 고려한 사람의 잠재능력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서의 ‘힘’이며, ‘주권’은 국가나 또는 神과 같은 절대자의 주권이 아니라 타인과 순환적으로 계속되는 관계들에 공정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사람의 행동기반으로서 사람들 개개인의 주권이지요. 따라서 神性이 비인격적 차원들에서 표현되는 정의, 힘(일률, 一率), 그리고 주권은 결국 ‘도덕’이라는 한 마다로 줄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우리네 일상의 삶에서 인격적인 면에서는 사랑으로, 비인격적인 면에서는 도덕심으로 표출된다는 거지요.

위의 본문에서 “그것은 행위 차원들을 식별하며 선택적으로 그것들 사이에 차이를 나타낸다.” 구절은 비인격적인 면에서 도덕으로 나타나는 ‘영-본성’은,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는 삼강(三綱),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이라는 도덕의 기본사상처럼, 타인들과 상대적 관계의 모든 행위들을 선택적으로 식별하며 매일매일 행동의 지침으로 각각의 행위에 차별성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7] “‘영-본성’은 변화에 직면하여 변화하지 않는다.”, “‘영-본성’은 살아남는 혼(魂)속에서 정체성을 가지고 인간의 죽음에서 생존할 것이다. ‘조절자’와 ‘영-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혼(魂)속에서 이들의 관계는 다만 변화, 계속되는 진화일 뿐이다; 그리고 이 변화(성장)가 멈추면, 혼(魂)도 끝날 것이다.”

궁극적인 우주의 실재로서 ‘영-본성’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고, 정체성이 없는 ‘영-본성’이 어떻게 진화의 여러 차원들에서 개채들의 정체성으로 나타나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영-본성’은 살아남는 혼(魂)속에서 정체성을 가지고 인간의 죽음에서 생존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혼(魂, Soul)이라는 개념은 책의 111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사람의 물질적 마음은 ‘모론시아’의 천을 나르는 우주의 베틀이고,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는 그 위에 지속하는 가치와 신성한 의미들의 우주의 특성을 가진 靈-패턴들을 누비며, 이것이 잠재적 최종자로서 궁극의 운명과 끝나지 않는 생애로 인간의 죽음에서 살아나는 혼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불멸의 혼’의 진화적 창조에는 1)인간의 마음, 2) 인간의 마음에 내주하는 신성한 靈인 ‘생각 조절자’, 3) ‘영-본성’이라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낙원을 향한 긴 진화과정에서 첫 번째 고리인 인간이 내재하는 ‘영-본성’에 대한 자각과 인식을 확장함에 따라 생각 조절자는 이렇게 인식된 ‘영-본성’의 의미와 가치들로 마음과의 공동 작업으로 ‘혼’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창조하며, 이렇게 창조된 ‘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자아의 정체성이 육신의 죽음을 넘어 모론시아 세계로 이어져 보다 확장된 ‘영-본성’의 발현(發現)을 위한 진화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
‘조절자’와 ‘영-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혼(魂)속에서 이들의 관계는 다만 변화, 계속되는 진화일 뿐이다; 그리고 이 변화(성장)가 멈추면, 혼(魂)도 끝날 것이다.”라고 합니다.


영적진보는 진화의 단계별로 개체들의 마음이 물질적, 우주적 그리고 영적으로 변환되며, 이렇게 변환되는 개체의 마음이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와 점진적인 융합을 이루어가고, 이에 따라 개체들의 ‘영-본성’에 대한 인식도 점차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이지요. 진화하는 개체들이 유한차원들을 거쳐 亞-절대차원 그리고 절대차원으로 상승하는 과정에서 ‘영-본성’의 점진적인 발현(發現)을 위한 매체로서 개체들의 ‘몸’은 죽음과 새로운 ‘몸’으로 환생을 반복하게 되며, 이런 죽음과 환생사이에 자아의 정체성은 생각 조절자와 마음의 공동 작업으로 창조된 ‘혼’을 중간자로 하여 단절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혼’속에서
‘조절자’와 ‘영-본성’ 그 자체가 직접적인 변화를 겪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의 思考가 점진적으로 생각 조절자에 융합되고 ‘영-본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됨으로 개체들의 영적진보의 결괴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혼’의 창조 과정에서, 마치 베틀에서 날줄과 씨줄의 상호작용으로 다양한 문양이 짜지듯이, 점차적으로 상호 발전적인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진화의 최종 단계인 절대차원에서는 ‘영적마음’이 ‘생각 조절자’와 완전한 융합을 이루고, ‘영-본성’은 궁극적 실재인 神性으로 현현(顯現)되어 모든 것이 하나인 일상무상(一相無相)의 경지가 되면 ‘생각 조절자’. ‘영-본성’, ‘마음’ 그리고 ‘혼’이라는 구분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혼의 탄생과 이와 관련된 ‘영-본성’과 ‘생각 조절자’의 상관관계는 다음에 ’삶과 죽음‘의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편, 사람은 神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또한 증여받았기에 진화와 생존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포기할 수 있으며, 이렇게 진화와 생존을 자유의지로 포기한 개체의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면, 증여되었던 ‘생각 조절자’와 ‘영-본성’은 개체를 떠나며, 영적진화와 성장도 멈추어지고 ‘혼’ 또한 소멸된다고 합니다.

제 6장

‘영-본성’의 다른 특성들


[8] “그것은 靈에 더해질 수 있다, 이렇게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首位를 예증한다. (마음은 靈에 합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본문에서
“영-본성은 靈에 더해질 수 있다”라는 구절은 앞의 3장에서 살펴본 본문 중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나온 ‘영-본성’은 神格의 숙명에 이를 것”이라는 기술처럼, 인간에게 증여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은 진화하는 개체들의 인식과 영적수준이 향상되고 진보함에 따라 궁극에는 완전하게 현현(顯現)되어 본래의 神性을 이룬다는 것으로, 아버지로부터 기원한 아들이 성장하여 아버지처럼 되듯이 “이렇게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의 首位를 예증한다.”는 것이지요.


[9] “‘영-본성’은 독특하게 시간을 의식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이나 靈의 시간 인식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118편에서
“어떤 일정한 지성에게 성숙과 시간의식의 단위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시간단위는 하루, 일 년, 또는 더 긴 기간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의식적인 자아가 삶의 상황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그리고 생각하는 지성이 현세의 존재에 대한 사실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기준이다.”라고 합니다.


봄에 뿌려진 한 알의 볍씨가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땅과 하늘의 기운을 받아 풍성한 벼 이삭으로 성숙되듯이, 인간의 성숙도 시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의식적인 자아도 성숙하고, 이렇게 성숙된 자아의식으로 삶의 상황들을 평가하기에, 시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실들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시간에 대하여 12편에서는 “
시간 인식의 세 가지 다른 차원들이 있다.: 1) 마음으로 인식된 시간─연속되는 전후관계, 운동(Motion)에 대한 의식 그리고 지속기간에 대한 감각. 2) 靈으로 인식된 시간─神을 향한 이행(移行)에 대한 통찰 그리고 점점 증대하는 神性의 차원들로의 상승운동(the motion of ascent)에 대한 인식. 3.) ‘영-본성’은 실제(實際, Reality)에 대한 통찰부터 독특한 시간의식을 창조하며 이에 더하여 현재를 자각하고 지속기간을 인식한다.”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인식되는 시간에서 언급하고 있는 운동(motion)은 구체적인 사물의 운동을 의미하기보다는 모든 변화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마음은 모든 변화를 감지하고, 연속적인 변화의 전후관계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인식하며, 그런 변화가 지속되는 기간에 대한 감각을 마음으로 인식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반면에, 靈으로 인식되는 시간은 靈이 내주하는 모든 개체가 우주를 통하여 낙원을 향한 멀고도 긴 진화와 상승과정에 대한 통찰과, 이에 따라 확장되는 개체의 인식과 영적수준으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의 점진적인 발현에 대한 자각을 靈으로 인식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절집에 “
捉前念迷卽凡(착전념미즉범), 後念悟卽佛(후념오즉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생각에 붙잡혀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다.’라는 뜻이지요. 사람의 마음이 인식하는 시간은 과거 지향적이기에 사람들은 지나간 생각들에 묶여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靈이 인식하는 시간은 미래 지향적으로 지난 생각들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향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영-본성’은 우주의 궁극적 실제에 대한 통찰로부터 독특한 시간개념을 창조하며, 현재에 대한 자각과 지속기간에 대한 인식을 가짐으로 과거 지향적인 마음이나 미래 지향적인 靈이 인식하는 시간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118편에서 "절대 신격(神格)은 본성적으로 영원(eternal)하지만, 神들은 영원(eternity)속에서 하나의 체험으로 시간에 관계된다. 진화의 우주들에서 영원(eternity)은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현세의 영원함(temporal everlastingness)-영원한(everlasting) 현재이다."라고 합니다.


“절대 신격(神格)은 본성적으로 영원(eternal)하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원’이라고 풀이되는 원문의 ‘eternal'은 과거부터 미래에 걸치는 영원을 뜻합니다. 앞의 본문을 다시 쓰면 “절대 신격(神格)은 본성적으로 무한한 과거부터 무한한 미래에 걸쳐서 영원하다”라고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절대 신격(神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으로 어떤 정해진 기간으로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지요.


이에 반하여 神들에 대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영적체험은 각각의 개체들이 처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
진화의 우주들에서 영원(eternity)은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현세의 영원함(temporal everlastingness)-영원한(everlasting) 현재이다.”라는 설명은 우주의 개체들이 진화하며 상승하는 지역우주, 초우주, 그리고 중앙우주들에서 神들에 대한 영적체험은 그 개체들이 처한 현재, 즉 영원한 현재라는 시간의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의 원문인 ‘everlasting’은 현재라는 시작점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영원’을 뜻합니다. 우주에서 진화하는 개체들의 神들에 대한 영적체험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 이루어지며, 무한한 미래에 걸쳐서 계속되는 영원한 현재 속에서 神들에 대한 영적체험이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앞의 본문에서 말하는 “
‘영-본성’은 실제(實際)에 대한 통찰(insight into Reality)부터 독특한 시간의식을 창조하며 이에 더하여 현재를 자각하고 지속기간을 인식한다.”라는 구절에서 ‘실제(實際)’란 앞에서 살펴본 ‘절대 神格’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이 인식하는 시간은 마음이나 靈이 인식하는 시간의 개념과는 다르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절대 神格의 영원에 대한 통찰로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지만, 한편으론 내주하는 인간의 ‘현재’라는 시점과 그 ‘현재’가 있기까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영-본성’은 절대 神格의 영원 속에서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을 구분하여 인식함으로 미래라는 시간 개념도 생겨납니다.


12편에서는 이렇게 독특한 시간의식을 갖는 ‘영-본성’에 대하여
“인간의 ‘영-본성’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이라는 사건들에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본성’은 그러한 사건들의 우주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영-본성’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절대 神格의 영원 속에서 현재라는 시간 그리고 현재가 있기까지의 과거라는 시간을 인식함으로 미래라는 시간개념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일반적인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은 시간과 공간의 작용으로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이런 시간과 공간에서 비롯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에 대한 통찰 속에서 시간을 구분함으로, 바로 시간과 공간 그 자체를 있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영-본성’에 대한 인식이 초보단계에 있는 인간은 과거 지향적인 마음의 시간이나 미래 지향적인 靈의 시간개념과도 다르고, 더욱이나 우리네 일상의 시간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인 절대 神格의 영원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영-본성’의 시간의식을 알 수 없기에, 위의 본문에서도 “영-본성은 독특한 시간개념을 창조한다.”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112편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본성’의 속성들을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서문에서 “
인간들은 여러 명칭들로 불리는 신성한 ‘영-본성’들(Personalities)의 관계들에 대하여 더욱 혼동이 되고 분명치 않다.”라는 지적에 대해서 ‘영-본성’의 희미한 그림자만 겨우 그려본 것 같습니다. 우주에서 진화하는 개체들에 내재하는 ‘영-본성’의 본질과 ‘영-본성’의 점진적인 발현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성찰과 영적체험들이 필요하겠지요.


인간에서 출발하여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절대경지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발현하는 ‘영-본성’은 우주의 궁극적 실제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지향을 견인하는 주체로, 인간이 가정하고 있는 ‘나’외 ‘나의 것’이라는 물질적 자아에 대한 통상적인 가치와 의미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책을 진술한 하늘존재들은 진화를 통한 머나먼 우주로의 여정에서 자유의지의 개체들이 체험하게 되는 우주의 실상들을 예시해주며, 사람에게 현상을 넘어서 본질의 탐구를 부단히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영-본성’괴 자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마감합니다. 그동안 연재가 길어져서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진리’,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연재는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 독자 여러분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쳤다면 양해바랍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블루베리 11-06-04
 
일련의 글을 깊은 관심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깊숙이 탐구한다는 것이 깨달음에 대한 갈증임을 공감하면서 내용에 관계없이 존경합니다. 진지함과 학문적 깊이에 배우는 바도 많구요. 다만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어른을 존경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시리라 믿고 감히 감상을 말해 보겠습니다.

한탄하시며 결론에서 인용하신 글- “인간들은 여러 명칭들로 불리는 신성한 ‘영-본성’들(Personalities)의 관계들에 대하여 더욱 혼동이 되고 분명치 않다”는 말이 이제까지 보여주신 혼동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영-본성을 Personality 그리고  spirit-nature로 "여러 명칭"에 사용하신 개념적인 혼동으로 글을 마치셨습니다. 무슨 수로 영-본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시겠다는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Personality이자 동시에 spirit-nature인 그러한 영-본성을 개념적으로 착상하셨다면 유란시아 저자들도 엎드려 절해야 하는 성취입니다.  그런 개념이 유란시아서에서 말하는 Personality이자 곧 "영-본성"이라고 정의하시면 계시에 대한 오시입니다. 개인적 소견의 범주가 아닙니다.

진리를 깨우치는 길에서는 모든 해석을 다양성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넌지시 자신을 변호하셨지만, 코너킥님의 지적처럼 만약 수박에 대한 개념도 낱말도 모르는 분이 참외를 가지고 수박을 설명한다면 해석의 다양성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여량님은 유란시아서를 다가서는 불자의 시각을 알아야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셨지만, 연재된 글은 유란시아서에 다가가는 글은 아니라, 오히려 극도로 경계하는 마음이 보일 뿐입니다.  이런 자세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유란시아서의 계시가 한낱 언어적 사념적 노리개로 추락될 뿐입니다.

일단 Personality와 spirit-nature가 전혀 별개라는 뚜렷한 확신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대화가 가능하지요.  모든 진리를 다 수용한다는 정신적 오만은  불교식 자기망상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듭니다. 종교에 도취된 분들이 "내가 곧 (언젠가는) 신이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마취가 심할수록 큰소리로 선포합니다.  이런 미망 중에서 가장 빠져나오기 힘들고 심각한 것이 바로 불성에 만유를 묻어버라는 불교 철학이구요.

유란시아서에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무아가 불교에서는 궁극의 해탈입니다. 모든 학문적 성취나 삶의 체험이 우주의 대혼으로 소멸된다는 말은 무아를 성취하는 분의 해탈과 동의어입니다. 유란시아의 우주의 대혼이 불교의 해탈심과 불성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궁극의 무아를 추구하는 분에게 유란시아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만약에 자성(自性)에서 발원되어 불성을 깨닫고 여러 해탈을 거쳐 열반에 드는 과정과 유란시아서에서 소개된 우주 대혼이 형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면 불자들의 미망은 깨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을 해볼 만한 용기 있는 불자는 보기 어려울 겁니다. 무(無)가 주는 달콤한 안락은 정말로 끓기 어려운 마약이기 때문이지요. 진정으로 열반에 들 수 있는 새롭게 탄생될 불자라면, 우주-대혼, 즉 personality를 벗어버린 진정한 해탈의 경지와 그 한계가 무엇인지 유란시아서에서 찾아낼 것입니다. 

오류만 보이는 편협함때문에 소견을 낼 논제를 찾을수 없다보니, 노작을 읽은 개인적 소견에서, 안타까운 심정에서 전체를 평하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불자들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한 또 다른 독선이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여량 11-06-04
 
아무도 본적이 없는 수박이라는 과일이 50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 과일 시장에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동안 익히 알고 있던 과일인 참외나 사과를 가지고 해석해 보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유란시아 책에는 기존의 여러 과일 맛이 모두 들어 있다고 책 내용에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과일 맛을 모르는 식물학자가  새롭게 정의하고 설명하는 수박보다, 그간의 과일 맛과 비교하며 설명하는 수박이 오히려 올바른 설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블루베리 11-06-05
 
결론에서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희미한 그림자처럼 알수없다는 결론을 보면 솔직히 왜 유란시아서를 읽는지 의아하네요. 불경을 이해하려고 유란시아서를 읽는게 아닌가 합니다만, 초가집을 지으려고 고층빌딩을 허물어 재료를 구하는  것과 같겠지요.

편견이겠지만, 참외같은 수박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연재내내 참외를 말하고 있으며 유란시아서의 논제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 예로서, 이번 연재도 첫부분의 신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여준 영-본성에 대한 혼란은 물론이고, 이번 연재에서 신성과 영-본성의 차이도 모르고 계심이 명백합니다. 신성과 영본성을 혼란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불성으로 귀결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불교도 깨우치고 있다는 자성안에서는 불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유란시아서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정반대되는 주장같아서, 불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번개 11-06-05
 
벼락치기로 굵은 글만 읽습니다. “영-본성은 靈에 더해질 수 있다” 문법에도 어긋나는 이런 말이 유란시아 책에 있나요?
댓글다는 분이 계시니 무시하기가 그렇네요.
유란시아 書와 佛經(10) 
유란시아 書와 佛經(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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