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10)   11-07-01
E.T   968
 

제 7장

진리

모든 종교나 철학에서 추구하는 것이 진리이고, 가늠하기 힘든 우주들에서의 장구한 진화의 과정에서 추구하는 것도 진리이지요. 이런 진리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앞장에서 살펴본 ‘영-본성’의 경우와 같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책에 수록되어 있는 진리로 나아가는 길의 이정표를 따라 그 자취들을 더듬어 봅니다.


130편에서;
지식은 물질 또는 사실을-식별하는 마음의 영역이다. 진리는 영적으로 증여된 지성의 영역으로 神을 아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지식은 논증할 수 있다; 진리는 체험된다. 지식은 마음의 영역이다; 진리는 진보하는 자아인 혼의 체험이다. 지식은 비(非)영적 차원의 작용이며; 진리는 우주들의 마음-영 차원의 단계다. 물질적 마음의 눈은 사실적인 지식의 세계를 인지한다.; 靈化된 지성의 눈은 참된 가치들의 세계를 식별한다. 동기화(同期化)되고 조화된 이 두 관점은 실재의 세계를 드러내며, 거기에서 지혜는 우주의 현상들을 발전하는 개인적 경험으로 해석한다.”


위의 본문에서 지식은 물질과 사실들을 식별하고 구분하는 물질적 마음의 작용으로 논증이 가능하지만, 진리는 神과의 관계성을 의식하는 靈的인 부분으로 논증을 초월한 개인적 체험의 영역으로. 이렇게 물리적인 사실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으로 우주의 실제(實際)의 참된 가치들을 식별하는 靈化된 지성의 눈이 조화롭게 동기화(同期化) 될 때 우주의 실상(實相)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물리적인 사실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으로 우주의 실제(實際)의 참된 가치들을 식별하는 靈化된 지성의 눈’에 대하여 부언하면, 앞에서 살펴본 112편에서
“마음이 실재(實在)를 그것의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물질은 물질적 분별들로 사라지지만, 아직 마음에는 실재적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 영적 통찰력으로 물질이 사라진 후 마음에 남아 있는 그 實在를 추적하고 그것을 궁극의 분석에까지 추적하면, 그것은 마음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靈의 통찰력은 아직도 영-본성의 우주 實在들과 최고 가치들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또한 “인간의 유기체에서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合이 자아(自我)─개체성─를 이루지만, 그런 과정은 우주의 실재들과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는 '영-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물질적 마음의 눈은 인간이 우주의 실재 또는 ‘나’라고 생각하는 우리네 ‘몸’을 궁극에까지 분석하면 인간의 ‘몸’은 일시적인 유기체의 화합물로 참된 우주의 실재가 아니며 참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물리적인 사실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물질적 마음의 한계로 아직은 마음의 여러 작용들이 사람의 의식에는 우주의 실재로 남아있으며, 이런 물질적 마음의 영역을 넘는 마음의 현상들은 靈化된 지성의 눈을 통하여 실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 靈化된 지성의 눈은 인간의 물질적 몸과 마음으로 인식한 우주의 실재로서의 개념들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에서 ‘영-본성’의 참된 우주 실재들과 최고의 가치들을 식별할 수 있기에 이런 두 가지 관점의 조화를 통해서만 우주의 일시적 제반 현상들과 이런 현상들의 본질을 통찰함으로 우주의 실상(實相)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112편에서는 또한
“자아의 모든 개념들에서 삶의 현실이 우선이며, 삶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나중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인간이라는 아이는 우선은 살고, 그 후에 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주의 理法에서는 통찰이 예지보다 앞선다.”라고 앞에서 기술한 것을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물적 기원으로부터 진화한 인간은 우선 물질적 유기체인 ‘몸’을 자아로 인식하고, 이렇게 인식된 ‘몸’의 생존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 확장되고 우주의 理法에 대한 통찰이 증대됨에 따라 自我로 여겨왔던 물질적인 몸과 마음의 작용들을 궁극에까지 분석하여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물질적 마음이 인식하고 판별한 自我의 모든 것이 일시적 현상이라면 인간의 물질적 마음은 의지처(依支處)를 상실함으로, 절집에서 말하는 “恐落空無棲泊處故 望崖而退 例皆廣求知見(공락공무서박처고 망애이퇴 예개광구지견), 空에 떨어져 머물 곳이 없을까 두려워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널리 지견을 구한다.”는 절박한 상황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위의 본문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을 넘어 靈化된 지성의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우주의 實際의 참된 가치들이 있으며 이것이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에서 “
진리는 진보하는 자아인 ‘혼’의 체험이다.”라고 합니다. 앞 장에서는 ‘자아’를 내주하는 ‘영-본성’에 대한 인식으로 형성된 개인의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했고, 위의 본문에서 ‘혼’을 ‘진보하는 자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혼’이란 마음의 베틀에 ‘생각 조절자’가 사람이 인식하는 우주의 의미와 가치(‘영-본성’에 대한 인식)를 날줄로 하여 짜내려간 靈-패턴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본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됨에 따라 자아의 정체성도 진보하며 혼’이라는 靈-패턴의 직물도 길이가 늘어나겠지요. ‘자아’와 ‘혼’의 관계는 뒤에 ‘삶과 죽음’의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어서
“동기화(同期化)되고 조화된 이 두 관점은 실재의 세계를 드러내며, 거기에서 지혜는 우주의 현상들을 발전하는 개인적 경험으로 해석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의 세계’란 우주 망원경으로 바라본 수많은 은하가 펼쳐진 광대한 우주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주의 현상들과 그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본질에 대한 개인의 영적경험으로 우주의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두 가지의 눈이 조화롭게 동시성을 이룰 때, 불가(佛家)에서는 지혜의 눈인 혜안(慧眼)을 얻을 수 있고, 이 慧眼(혜안)을 통해서만 우주의 실재를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물질적 마음의 눈과 靈化된 지성의 눈이 얼마나 조화롭게 동기화(同期化)되어 있을까요?


물질적 마음의 눈과 靈化된 지성의 눈의 조화로 들어난 우주의 실재를 佛家에서는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색(色)’이란 현상계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위의 본문에서 “지식은 물질 또는 사실을-식별하는 마음의 영역이다.”라는 구절에서 ‘물질 또는 사실’과 같은 의미이며, 공(空)은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실제(實際)이지요. 그런데 ‘공(空)’이라는 글자가 많은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불교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無’ 또는 ‘허무(虛無)’라는 의미로 ‘空’을 해석해서 佛家의 논리를 허무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空’은 道, 法, 眞理, 또는 眞如의 自性이라는 의미로, 앞장에서 살펴본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라는 의미와 같은 뜻으로 읽어도 큰 잘못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 ‘영-본성은 無이며 없다’라는 뜻이 아니지요. 절집에서는 “如來欲顯法身故 說一切諸相皆是虛妄 若悟一切諸相虛妄不實 卽見如來無相之理也 (여래욕현법신고 설일체제상개시허망 약오일체제상허망부실 즉견여래무상지리야), 여래가 법신을 드러내려고 일체의 모든 상(相)이 허망하다고 말한다. 만약 일체의 모든 상(相)이 허망하고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바로 여래가 무상(無相)인 이치를 알 것이다.”라고 합니다. 책에서 ‘정체성이 없는 영-본성이 모든 개체들의 자아와 인격으로 실현된다.’는 것과 같이 佛家에서 말하는 ‘色卽是空’도 우주의 제반 현상들은 본질에서는 空性인 진여 또는 진리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뒤집으면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물질 또는 사실을 대변하는 색(色), 그리고 진리를 대변하는 공(空)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앞에서의 본문과 같이 물리적인 사실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으로 참된 가치들을 식별하는 靈化된 지성의 눈이 조화롭게 동기화(同期化) 될 때에는 色이 바로 空이 되고, 空이 바로 色이 되며, 이것이 우주의 실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현상과 본질을 관통하는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아는 물질적이던, 모론시아적이던, 또는 영적이던 모두 우주의 실재라는 것이지요.


佛家에서는 ‘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인 지성의 눈이 조화롭게 동기화(同期化)된
상태’
의 또 다른 표현을 일척안(一隻眼)이라고 하지요.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 마음의 눈’이라는 두 관점이 조화롭게 융화(融和)되어 제3의 새로운 심안(心眼)이 열리게 되면 본질과 현상이라는 두 가지의 차별적인 시각을 초월해서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책의 130편에서 “한쪽 눈만 가진 유물론의 과학자들이나 한쪽 눈만 가진 영적 신비주의자들과 풍유가(諷喩家)들은 우주실재의 참된 깊이들을 정확하게 마음속에 그리거나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한쪽 눈만으로 우주를 바라보면 한쪽 눈의 관점은 다른 눈의 관점과 갈등을 빚지만, 두 눈이 조화롭게 융화된 일척안(一隻眼)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우주의 실상이 보인다는 거지요.


103에서; “우주에 대한 논리적이고 시종일관된 철학 개념은 물질주의 또는 심령주의의 가설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이 두 가지 사고(思考) 체계들은, 우주적으로 적용될 때, 우주를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안쪽을 밖으로 돌려놓은 우주와 접촉하고, 후자는 밖을 안으로 돌려놓은 우주의 현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과학이든 종교든 독립된 상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인간의 철학과 신성한 계시의 조명의 인도가 없이는 우주적 진리와 관계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얻을 수가 없다.”


앞에서는 물리적인 사실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물질적 마음의 눈과, 영적으로 참된 가치들을 식별하는 靈化된 지성의 눈의 조화를 이야기하고, 위의 본문에서는 물질주의와 심령주의의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우주의 실재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이렇게 물질주의의 관점인 과학과 심령주의의 관점인 종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책에서는
“과학과 종교의 보다 조화로운 일치에 이르는데 너희가 겪는 어려움은 물질과 본질들의 중재영역인 모론시아 세계에 대한 너희들의 완전한 무지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인간과 神 사이에 중재영역인 모론시아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간은 과학과 종교의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과학은 과학으로, 종교는 종교로 각각 분리된 시각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에 우주의 실재를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물질주의의 관점인 과학과 심령주의의 관점인 종교 간의 조화로 드러나는 실재에 대하여 앞의 3장에서 살펴본 196편에서 “실재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는 神에께 접근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神의 발견, 실재와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은 자아-완성, 즉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총체성을 체험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 총체적 실재의 체험은 神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 神을 아는 체험의 종국(終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과학과 종교의 부조화는 인간의 神에 대한 무지(無知)에서가 아니라 모론시아 세계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영적진화의 첫 번째 고리로 우주의 어린아이인 인간에게 진화의 종국(終局)인 神의 경지는 너무 요원(遼遠)하기에 神에 대한 인간의 무지(無知)는 당연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에게 神으로부터 증여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이 내재하고 있지만 이 또한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에, 우선은 물질적 마음의 눈과 靈化된 지성의 눈의 점진적인 조화를 위해서는 인간의 물질적 마음의 한계를 벗어나 진화의 다음 단계인 모론시아 세계에서 새롭게 증여된다고 하는 우주마음을 통하여 靈化된 지성의 눈을 떠야한다는 것 같습니다.


103편은 이어서
“필사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는 가설(假說)들로 서술되었다. 모론시아 차원에서 과학과 종교의 가정(假定)들은 ‘모타’의 논리로 부분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유한차원에서는 과학이나 종교의 논리는 모두 가설(假說)들로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靈化된 지성의 눈을 뜨지 못한 인간이라는 우주의 어린아이의 물질적 마음의 눈으로는, 또는 부분적으로 靈化된 지성의 눈이 계발되었다고 하더라도 물질적 마음의 눈과 조화되지 못한 이원적(二元的) 논리들로는 그들이 개별적으로 주장하는 어떤 가설도 증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차원을 넘어 영적으로 진보한 모론시아 세계들에서 진화를 거듭함으로서 얻게 되는 ‘모타’의 논리도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인간의 가설(假說)들 중 일부는 증명할 수 있지만, 아직도 물질적 마음의 눈과 靈化된 지성의 눈이 원만하게 조화된 상태가 아니기에 모론시아 차원에서 증명할 수 없는 가설(假說)들은 그 다음 단계인 영적차원에 가서야 증명될 수 있다는 겁니다.


132편에서;
“진리는 말로서가 아니라,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될 수 있다. 진리는 항상 지식 이상이다. 지식은 관찰된 사물들에 속하지만, 진리는 그러한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을 초월하며, 진리는 지혜와 조화를 이루고 인간의 경험처럼 헤아릴 수 없는 것들, 나아가서 영적이며 살아있는 실재들까지를 포함한다. 지식은 과학에서 시작되고; 지혜는 진정한 철학에서; 진리는 영적 삶의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지식은 사실들을; 지혜는 관계들을; 진리는 실재의 가치들을 다룬다.”


진리는 말이나 글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개개인의 개별적인 영적 경험들과 나아가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實在들까지도 포함하며, 지혜를 매개로 현상과 본질이라는 분리된 두 관점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실제적인 삶의 직각적(直覺的)인 체험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진리는 영적으로 증여된 지성의 영역으로 神을 아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神의 발견, 실재와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은 자아-완성, 즉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총체성을 체험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위의 본문은 “진리는 오직 삶에 의해서만 정의(定意)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동물적 기원인 유기체로서의 ‘몸’의 생존을 우선 생각하지만, 비록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을 산다고 해도 단지 유기체의 생존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내재하는 ‘영-본성’과는 무관한 것이기에 神을 아는 것이나 또는 神에게 접근하는 길이 아니며, 물질적 마음에 의한 지식의 탐구를 위한 삶 또한 진리의 체험을 위한 삶은 아니라고 합니다.


앞장에서 사람이 神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에 의해서, 사랑을 통한 자비와 봉사의 삶이라고 했으며, 내재하는 ‘영-본성’의 인식을 통한 인간 참자아의 발견으로 神에게 다가갈 수 있기에, 책에 쓰여 진 글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삶으로 사랑과 봉사의 이행과 스스로의 내적성찰을 통해서만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佛家에 문자반야(文字般若)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만 사천 가지의 일체 번뇌에 대한 해답이 대장경(大藏經)에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대장경을 보아도 마음속 번뇌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경전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단지 지식의 수준으로 끝날 뿐이며 경전에 담겨진 진실한 뜻을 스스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자로 기록된 경전은 진실한 뜻을 말이나 글로서 드러내어 보인 ‘방편의 경전’으로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 하지요. 그래서 문자반야(文字般若)에 떨어지지 않고 그 방편들이 가리켜 보이는 실상(實相)을 스스로의 체험으로 깨달아 갈 때 방편의 문자반야(文字般若)가 실상반야(實相般若)로 전환될 수 있다고 합니다. 佛家에서 ‘
佛法者卽非佛法 世間法卽是佛法(불법자즉비불법 세간법즉시불법)’이라고 합니다. 관념적으로 고정된 개념의 불법(佛法)은 불법(佛法)이 아니며,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살아있는 불법(佛法)이 참된 불법(佛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행출제불(行出諸佛)이라고 하지요. 모든 부처는 행함에서 나온다는 말로, 바른 실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진리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이지요.

옛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두 친구가, 하루는 마침 호떡집 골목을 지나다가 한 호떡집에서 먹음직스런 호떡을 한판 내어 놓아서 막 사먹으려고 하는데 옆집에서도 새 호떡 판을 내어놓더랍니다. 어느 집 호떡이 더 맛있을까 둘이 상의하는데 또 다른 옆집에서 다른 모양의 호떡을, 또 다른 집도 계속 새로운 호떡을 내어 놓으니, 어느 집 호떡이 맛있는지 궁리하느라고 골목길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호떡 구경은 푸짐하게 했지만, 하나도 먹지는 못했습니다. 지나던 과객이 이 두 친구를 보더니, 여보시오! 제일 맛있는 호떡은 입안에 있는 호떡이 제일 맛있는 거라고 훈수 한마디 하더랍니다.

[스팸답글로 관리자에 의해 2011-08-04 10:17:46 독자 게시판에서 이동되었다가 복귀되는 바람에 정렬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곧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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