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깨닫거나 사색만으로도 값지다면, 세상에서 정직하게 흘리는 땀은 헛된 일입니다. 생각이 말씀이 되고, 말씀이 행동이 되었다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셈이지요.
깨달음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이 말씀이고, 그 진리의 깨달음을 널리 전하는 행동이 진리의 실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 실천이 아니라, 더욱 철저하게 진리만을 생각하는 삶이 됩니다. 자나 깨나 진리만을 '생각'하는 삶이지, 행동하는 삶은 아닙니다.
진리의 깨달음도 순수한 자기 생각이 아니라,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 사상이 계보 철학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전파하는 행위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얘기지요. 계보학으로 삶을 역사적 환경적 흐름에서 이해하고, 그 근원을 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도 생겨났고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현대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유란시아 책에 따르면,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만, 계시가 허락된다고 합니다. 유란시아 책이 바로 이런 현대인의 삶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되어 벽에 이르렀음을 반증하는 셈이지요.
계보학을 알건 모르건, 깨달음은 유전적 특징, 성장 배경, 과거 기억, 삶의 체험, 살아가는 형편, 지식 그리고 미래의 소망이라는 난마처럼 얽힌 환경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게시판에서 어느 분이 이런 깨달음의 철학은 존재의 참 모습과 사실을 밝힐 수 있지만, 존재의 이유는 종교만이 밝힐 수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존재하는 이유는 전혀 다릅니다. 유사이래의 철학자와 신학자와 사상가들이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사실과 이유라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평생을 바친 분들이 인류 문명을 이끈 횃불인 셈이지요. 많은 분들이 평생을 바쳤지만, 가장 극명하게 인간 존재의 이유와 모습을 알려했던 분이, 존재와 존재자의 상관관계를 고민했던 철학자 하이데거일 것입니다.
초기 번역에서 한글 용어가 잘못 채택되어 데카르트에서 잘못된 번역이 하이데거로 이어지다보니, 하이데거의 사상도 이해 불가한 개념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평생 화두였던 존재와 존재자는 현존재와 실존이라는 개념과 섞이면서 그의 사상이 부풀려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원어의 개념만 잘 따랐다면,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데카르트로 이어지는 계보 안에서 니체-하이데거-사르트르가 고민 했던 진리, 결국 존재와 존재자의 질문들이 한국에서 지금보다 더욱 넓은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지금 존재하는 존재자를 존재, 그 자체와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이 구분되는 결정적인 핵심이 시간이라고 정의한 것이지요. 그의 책 《시간과 존재》는 시간이 존재와 존재자를 어떻게 구분하여 정의하고 있으며, 현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적 행위를 드러내는 곳, 곧 존재가 드러나는 처소로서 존재자를 새롭고도 명쾌하게 정의한 것은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 행위가 일어난 존재자의 속성에 여전히 잔존하는 존재 행위의 원인을 《personality》로 제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personality》가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은폐된 영역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진리의 빛 속에 존재하도록 나선다고 해석했지요. 한마디로 하느님과 연계시키지 않고 인간의 사유만으로, 존재 행위의 진원지로 《personality》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경이롭습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이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personality》 개념에 아주 근접했다는 점에서도 존경심이 더욱 일어납니다..
한글 번역에서 하이데거의 생각이 얼마나 괴상하게 오역이 되었는지 원문을 대조한 사람마다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Sein. Seiendes, Dasein을 존재, 존재자, 현존이라는 용어로 번역한 것도 큰 문제지만 personality를 《성격》이라고 번역한 것도, 한국 철학계의 담론을 엉망으로 이끄는 데 일조한 셈이지요.
만약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의 물음에서, 절대자 하느님을 인간과 일대일로 마주할 수 있는 존재로서 도입할 수 있었다면, 한글 번역 《성격》은 존재자에 잔존하는 존재 원인이 아니고, 존재를 시작한 진원지로서 유란시아 계시에서 밝혀진 의미에 좀더 더욱 가깝게 해석될 수 있었을텐데, 지금 하이데거가 유란시아 책을 본다면 완벽한 정의에 땅을 치고 통곡했을 겁니다.
한글 표기도 문제지만, personality 원문 의미도 전적으로 현존에서의 어떤 은폐된 진리의 빛으로 보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타당하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새로운 개념 확장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적 어원에 매달리는 한, 의식 확장은 불가능하지요. 설혹 현존을 중시했어도, 한글 단어 《성격》은 하이데거의 원래 생각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용어입니다.
재단 번역에는 철학에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성격》을 personality의 번역으로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적으로 깊은 연구를 해 본 사람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으리라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격》으로 번역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단 번역을 읽다가, 《성격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성격》과 같은 개념으로 뒤섞여서 같은 말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지요. 거듭 읽어 보면서, 번역자나 번역팀의 누군가가 《존재》와 《존재자》의 현격한 개념상의 차이를 전혀 모르거나, 혹시 이 단어에 대한 철학적 기초 개념조차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긴 적이 있습니다.
철학은 물론이고, 유란시아 책도 《존재》와 《존재자》에 현격한 개념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personality라는 단어는 결코 《성격》과 《성격자》로 이리저리 바꾸어 번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요.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각각의 용어에는 얼마나 심오한 필생의 노력이 들어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무모한 일은 하지 않았겠지요.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쉽게 번역하려고 《성격자》 대신 《성격 존재》 라는 말을 《성격》과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별 생각없이 흉내내며《인격》과《인격체》를 읽기좋게 적당히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초라하지만 확실한 개념을 가져야만 의식 확장이 가능한 단어가 많이 있는데, 한 두 사람의 오역이 여러 사람들에게 유란시아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을 비틀도록 강요하는 셈이지요.
개정판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개념을 《개인성》과 《개인》으로 대치시킨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개념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현존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 고해서 《개인성》의 면모가 밝혀질 수는 없지만, 한글 용어인 《성(性)》에 배여 있는 민족 고유의 사상을 계보 철학에서의 분석으로 더듬어가면, 그 바탕에서 놀라운 의식 확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권 독자들이 personality로는 다다르기 힘든, 동양인 특유의 그리고 한국인의 고유한 우주관이 형성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부분적으로 미진하고 물질 위주의 서양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여 용어를 채택하거나, 개념없이 대충 비슷한 말을 흉내내어 사용한다면 동양인의 우주관이 새롭게 살아날 기회가 사라집니다. 좀 더 동양사상을 연구하고 그 바탕에 깔린 쉽고도 근원이 되는 우리말을 찾아내어 번역에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유란시아 계시가 더욱 강력한 빛이 될 것입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2-22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