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書와 佛經(8)   11-05-31
E.T   1,344
 

제 5장

사람과 ‘영-본성’

[6] “그것은 神의 의지를 행하는 것에 자유의지를 바치는 것으로 神에게 선물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의 상대성에 대한 의식인 도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행위 차원들을 식별하며 선택적으로 그것들 사이에 차이를 나타낸다.”


위의 본문에서 “
그것은 神의 의지를 행하는 것에 자유의지를 바치는 것으로 神에게 선물을 할 수 있다.”라는 구절은 그냥 평이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영-본성’을 가리키는 말로, 위의 문장에 ‘그것’ 대신에 ‘영-본성’을 대입해보면 “영-본성은 神의 의지를 행하는 것에 자유의지를 바치는 것으로 神에게 선물을 할 수 있다.”가 됩니다. ‘영-본성’은 잠재적인 神性이며, 神性은 神格(神)의 속성이기에, 마치 神자신이 스스로에게 선물을 한다는 말과 같아져 무슨 내용인지 아리송해집니다.


앞에서 살펴본 ‘영-본성’의 속성에서, 부분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로서의 사람의 몸은 ‘영-본성’과 관계가 없으며, 사람에게 증여된 ‘영-본성’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사람의 참된 자아로 우주의 실재라고 했습니다. 위의 본문이 뜻하는 것은
“사람에 내재된 ‘영-본성’은 ‘영-본성’의 부분적인 발현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물질적 자아로 하여금 그의 자유의지를 다하여 神의 의지를 행하게 하는 것으로 사람이 神에게 선물을 할 수 있게 한다.”라고 바꾸어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6편에서도 “예수는 왕국의 사람으로서 모든 공물(供物) 중에서 가장 큰 것을 神에게 드렸다; 신성한 뜻을 행하는 장엄한 봉사에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고 헌신하였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사람이 神에게 드리는 선물에 대해서 1편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인간의지의 애정 어린 헌신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神에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다; 사실, 피조물 의지의 그런 헌신은 낙원 아버지에게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오직 가능한 참된 가치의 선물이다. 사람은 神 안에 살고, 활동하고, 존재한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는 이 선택을 제외하고 사람이 神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우주들의 지성적 의지의 피조물들이 내린 그런 결정들이 사랑으로 특징지어진 창조주 아버지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진정한 경배의 실체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이 인식한 ‘영-본성’이 사람의 자아를 이루며, 그렇게 이루어진 자아는 단지 ‘영-본성’의 부분적인 발현으로, 어떻게 내재하는 잠재적 神性인 미지(未知)의 ‘영-본성’이 사람의 물질적 자아에게 그의 자유의지를 다하여 神의 의지를 행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절집에 훈습(熏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에는 향기가 없지만 옷을 향료와 같이 두면 그 옷에도 향기가 배어나는 것처럼, 사람에게 내재하는 佛性이 각자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자극하여 삶의 실상을 자각하게 하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을 진여훈습(眞如熏習)이라고 합니다. 위의 본문에서의 설명도 사람에게 내재하는 ‘영-본성’은, 비록 사람이 직접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그 자체가 내주하는 개체들의 자아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영-본성’ 자체에 갖추어져있는 미지의 힘이 사람의 물질적 자아에게 그의 자유의지를 다하여 神의 의지를 행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영-본성’은 정체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神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다는 일부 聖人들이나, 神에 대한 믿음이 특별한 신앙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이 알고 있는 우주 아버지이며, 전능한 창조주라는 개념들이 神의 정체성일까? 神의 의지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神의 의지를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앞에서 살펴본 112편에서의
“자아의 모든 개념들에서 삶의 현실이 우선이며, 삶에
대한 평가나 해석은 나중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라는 기술처럼 부분들의 합이 유기체를 이루고 이렇게 이루어진 몸을 사람들은 자아로 인식하는 幻想속에서 우리네 삶을 시작하고, 나중에 가서야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내면을 통찰함으로 자신의 참-자아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神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神에 대해서 하는 말들을 듣고, 책에서 이런저런 神에 대한 설명들을 읽고, 또는 혼자서 사색하며 神을 찾아보기도하고, 이렇게 모여진 수많은 이야기들의 합이 神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神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나 개인적 사색의 결과들을 합한 것이 과연 神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몸속에 내재되어있는 참된 자아로서의 ‘영-본성’의 실상을 찾는데 깊은 통찰과 우주를 통한 오랜 기간의 진화과정들에서 힘든 수행과 정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환상의 자아에 묶여서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지요. 책에서는 인간을 “우주의 고립된 어린아이들이며, 우주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들은 시간의 상대적 순간 속에서 태어나고, 살며, 그리고 죽는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神의 참된 의미를 어떻게 찾으며, 시간의 상대적 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神의 의지를 알 수 있을까요?


어떤 미국사람이 대상(隊商)을 따라 티베트 사막을 이동하고 있었는데, 사막의 뙤약볕 아래서 더위와 갈증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미국인은 참다못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당장 아이스크림소다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옆에 있던 티베트 사람이 이 소리를 듣고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아이스크림소다가 무엇인가요?”

“그건 기막히게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수지요!”

“그런 음료수라면 우리가 좋아하는 버터-티 같은 맛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요.”

“찬 우유 같은 맛인가요?”

“그런 것도 아니요. 아이스크림소다는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고 거품도 일어나는 것이요.”

“거품도 있다면 우리네 보리맥주 같은 맛인가요?”

“아니요, 그런 것들과는 다른 것이요.”

“그러면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우유, 크림, 계란, 설탕, 향료, 얼음, 그리고 소다수, 등이요....”

어리둥절해진 티베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괴상한 혼합이 기막힌 음료수가 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아이스크림소다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재료들을 일일이 알려준다고 아이스크림소다의 맛을 알게 할 수는 없겠지요.

3편에서 神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필사의 사람은 神의 전형(典型)으로-사람 속에는 무한의 단편이 살고 있다-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무한한 속성들에 대한 유한한 인식은 논리적으로 피조물의 제한된 능력들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므로 神에게 사람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접근은, 神은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런 유일한 관계의 모든 것은 우주의 사회학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애정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다.”

위의 본문에서 “필사의 사람은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졌다. (Mortal man is made in the image of God.)”라는 구절을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사람을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내셨다.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네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고, 천국에 계신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라는 불후의 명작에도 하느님과 사람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58편에서 “식물이나 동물의 모든 조상이 되는 생명은 소금이 용해된 환경에서 진화하였다”, “새로운 種들과 다양한 계층들의 생명 유기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전적으로 생물학적이며, 순전히 자연적이다. 이런 발생적 돌연변이들에 관계된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여러 편들에서 生物들의 구체적인 진화 과정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진화과정들을 거쳐 62편에서는 약 백만 년 전에 영장류로부터 인간의 최초 조상인 안돈(Andon)과 폰타(Fonta)의 출현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62편의 기술에 따르면 5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바닷물 속에 생명 원형질이 최초로 심어진 이후 생명의 진화는 계속되었고, 진화의 결과로 점진적으로 출현한 상위의 동물 개체들에서 뇌의 수용능력이 계속적으로 증대됨에 따라 지구에 배정되었던 일곱 보조-마음 靈들 중에서 최초로 본능적 그리고 반사적 행동의 ‘직감의 靈’이 원시동물에 부여되었고, 더 상위 형태의 동물들로 다양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해의 靈’이 증여되고, 그 후에는 ‘용기의 靈’이 증여되었다고 합니다. 포유류 집단들이 출현하면서 ‘인식의 靈’이 나타났고, 원시적 사회발전의 시작과 집단본능이 커진 더 상위의 포유류로 진화됨에 따라 ‘분별의 靈’이 작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포유류와 영장류의 단계까지 진화된 상태로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으로, 약 백만 년 전에 안돈(Andon)과 폰타(Fonta)의 출현으로 ‘경배의 靈’‘지혜의 靈’이 증여됨으로 지구에는 인간이라는 의지-생명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의 본문에서 “필사의 사람은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졌다.”는 구절을 이렇게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출현하게 된 인간을 神의 모습으로 만들어 졌다라고 풀이할 수는 없으며, 112편에서는 기나긴 우주 진화의 여정에서 인간의 다음 단계인 모론시아 존재의 형상마저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한 것을 보면 사람의 형상과 神의 모습을 바로 연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동물적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육신의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된 일곱 보조-마음 靈들이 인간의 물질적 마음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이런 인간에게 증여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과, 또한 본문에서 “사람 속에는 무한의 단편이 살고 있다.”라는 기술처럼 무한의 단편인 ‘생각 조절자’가 내주하며 인간의 물질적 마음과 점차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넘어 神의 그림자를 그려볼 수 있기에 “필사의 사람은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졌다.”라고 기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神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117편에서는 “필사의 사람은 상징적으로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진 것 이상이다. 물질적 관점에서는 이 진술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우주 잠재성들에 관하여서는 이것은 실제적 사실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필사의 사람은 상징적으로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진 것 이상이다.”라는 구절은 앞 장에서 살펴본 1편에서 “우주들의 우주에 있는 모든 천체와 각각의 세계의 모든 영적존재와 필사의 피조물들에게 우주 아버지는 그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라는 설명처럼 ‘영-본성’의 증여를 통하여 우주 아버지의 자비롭고 신성한 자아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드러내었기에 사람은 상징적으로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진 것 이상이지만, 물질적 관점에서 사람을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우주 잠재성들에 관하여서는 이것은 실제적 사실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 잠재성이란 사람에게 증여된 잠재적 神性인 ‘영-본성’이 앞의 3장에서 살펴본 “사람의 ‘영-본성’은 영원하지만 정체성으로 본다면 조건화된 영원한 실재이다.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나온 ‘영-본성’은 神格의 숙명에 이를 것.”이라는 기술처럼 궁극에는 神의 경지에 이를 것이기에 우주 잠재성의 측면에서는 사람이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보다도 실제로는 그 이상, 즉 사람은 단순히 神의 전형(典型)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神格에 이를 숙명을 가진 잠재적인 神이라는 것이지요. 석가모니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정등각(正等覺)이룬 후에 살펴보니, 자기가 깨달은 불성(佛性)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단지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개별적인 他者로 보이지만, 부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부처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3편의 본문은 이어서 “무한한 속성들에 대한 유한한 인식은 논리적으로 피조물의 제한된 능력들을 훨씬 초월한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주 잠재성의 측면에서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한편으론 “우주의 고립된 어린아이들이며, 우주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들은 시간의 상대적 순간 속에서 태어나고, 살며, 그리고 죽는다.”는 유한한 존재로 많은 제약과 한계들이 있지만, 神의 무한한 속성들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神으로부터 증여받은 靈들의 작용으로 물질적 한계들을 훨씬 초월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어서 “
그러므로 神에게 사람의 가장 가깝고 친밀한 접근은, 神은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런 유일한 관계의 모든 것은 우주의 사회학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애정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神의 전형(典型)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모든 논리적인 제약들을 초월하여 神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길은,
“神은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사람과 神의 관계는 오직 사랑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면 神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117편에서는 “사람은 노력이 없이는 우주에서 상승하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神에게 다가가는 사랑의 길은 그냥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우주의 실재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애정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 주변에 대한 사랑의 체험으로 확장되고, 더 넓게는 우주의 실재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
아버지와 아들의 애정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요? 한동안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회자되었지요. 어린 아들은 영어공부를 위해서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고 엄마는 어린 아들의 뒷바라지로 아들과 같이 미국으로 건너가 아빠 혼자만 한국에 남아 열심히 돈을 벌어 아들의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시혜자(施惠者)와 수혜자(受惠者)라는 상대적인 관계로 바뀌어 가면서 어느 날 아버지는 그런 삶에 대한 회의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한한 희생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수는 있지만,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랑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친밀한 관계를 이루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특성을 가지며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을 야기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이런 온갖 현상적인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넘어 아버지와 아들간의 참사랑이 체험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근원의 동일성에 대한 자각으로 상대적인 너와 나의 벽이 허물어질 때 싹트는 것이 아닐까요? 神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랑의 길도 사람에게 내재하는 ‘영-본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우주의 모든 실재들과의 근원적인 동일성에 대한 자각이 확산되고, 그런 자각이 유한의 벽을 넘어 무한으로 확장될 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랑에 대해서 100편에서는 “사람이 성장하게 할 수는 없지만, 성장에 좋은 조건들을 제공할 수는 있다. 성장은 물질적, 지적 또는 영적이건 항상 무의식적이다. 사랑은 그렇게 성장한다.; 그것은 창조되거나, 만들어지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해야만 한다. 진화는 성장의 우주기법이다. 사회적 성장은 입법으로 보장될 수 없으며, 도덕적 성장은 개선된 행정으로 얻을 수 없다. 사람이 기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의 참된 가치는 반드시 인간의 문화와 개인적 평가에서 유래되어야만 한다. 사람이 성장에 대한 유일한 기여는 그의 ‘영-본성’의 모든 힘들의 동원인 살아있는 믿음이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神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인 사랑은 책에서 배우거나, 다른 외적인 수단으로 창조되거나 만들질 수 없으며, 돈으로 물건을 사듯이 천국을 가기위한 조건으로 베풀어지는 사랑 또는 극락에 가기위해서 이웃에 베푸는 자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질적 본성에서 비롯한 분별적인 사랑을 넘어 神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은 영적진화를 통하여 우주의 실재들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며, 무한한 다양성을 가진 우주의 모든 실재들의 참 자아인 ‘영-본성’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에서 무의식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위의 본문에서 “사람이 성장에 대한 유일한 기여는 그의 ‘영-본성’의 모든 힘들의 동원인 살아있는 믿음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영-본성’이란 비록 神으로부터 모든 존재에게 증여된 ‘영-본성’은 동일하지만, 사람들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차등적으로 발현되어 개별적인 자아로 표현된 ‘영-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네 삶에서 神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사랑을 성장하게 하는 것은 자아의 모든 힘을 동원한 살아있는 믿음뿐이라는 것이지요.

절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聖人求心不求佛(성인구심불구불), 愚人求佛不求心(우인구불불구심),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니 마음을 구하지 않는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10-14 독자 게시판에서 복사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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