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와 그림자   16-02-18
여량   538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가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거의 절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도 많지만, 삶의 대부분의 성공이나 실패처럼 어떤 보람 있는 일들이나 후회되는 일들은 모두 의지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진실이나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 의지만 내세울 때, 고집이다 편견이다 지적하고 조언을 합니다.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보니, 어떤 조언도 서로 상대방의 생각일 뿐이라고 고집 부리기도 합니다. 끝없이 다투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미리 서로 합의하고 약속한 기준으로, 누가 양보할지를 가리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질서와 법이 있는 것이지요.

자기랑 상의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법은, 따를 수 없다는 옹고집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은 상식선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요. 실제로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편견이나 옹고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조화롭게 지내려는 삶의 기본을 지키고 있고, 상대적으로 잘못이 나타나도,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에 따라 일시적 오해도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산 장사와 소금 장사처럼, 극명하게 이익이 상반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갈등이나 충돌은 오히려, 힘과 지혜를 모아서, 더 이상 불편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전하는 동기가 됩니다. 시대나 환경이 바뀌어도, 불편의 여지가 없도록, 미리 참신한 의견이나 창의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어가는 것이 문명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잠시 편견이나 고집이 있어도,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성을 다루는 세계는 얘기가 다릅니다. 절대성을 주장하면 서로 굽힐 수는 없으니, 결판날 때까지 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 세계이겠지요. 마호멧과 예수를 모두 다 선택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배교자가 되는 셈이지요. 종교에서 진리는 삶의 모든 것, 나아가 우주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관을 고치지 않으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우지 않으려면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유란시아 책은 완전한 영적 진리를 실체로서, 인간의 부분적인 해석과 미숙하고 불완전한 판단을 그림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체와 그림자에 대한 우화가 편견에 관한 가르침으로 종종 예시되고 있습니다.

실체를 직접 보기 전에는, 창의력이나 지혜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실체에 비해서 편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은 인간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가본 적이 없는 세계를, 그곳에서 내려온 존재들이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하는 최대한의 범위 내에서, 진리를 실체로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이해하는 한계를, 자신이 실감하는 실체를, 책이 계시하는 진리라고 선포하고 싶은, 자유 의지적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는 한, 그러한 욕망은 살아있는 진리의 자연적인 역동성이라고 합니다. 다만, 실체를 만난 진정한 진리의 역동성인지, 아니면 편견인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와 탄성으로 더욱 확대되는 실체인지, 아니면 저마다의 편견으로 실체가 혼란스럽게 되는 것인지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굴 안에서 외치는 탄성과 기쁨은, 실체를 보면서 느끼는 탄성과는 어딘지 다를 것입니다.

동물적 게으름, 생명의 난폭성, 원시적 탐욕, 근시안적 선택, 물질적 투쟁, 맹렬한 야망, 원초적 감정, 파괴 본능, 평범한 안락, 무력한 타성, 악에 대한 변명, 환멸의 두려움, 소멸의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슬픔들은 어쩌면 우리를 가두고 있는 동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그렇게 겹겹으로 갇힌 동굴 속에서 태어나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림자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조화우주적 진화에 있어서 물질은 신성한 계몽의 영 발광체의 현존 안에서 마음에 의해 부어진 철학적 그림자가 되지만, 이것은 물질-에너지의 실체를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마음, 물질, 그리고 영은 똑같이 실제적이지만, 그것들이 신성의 달성에 있어서 개인성에 대해 똑같은 가치가 되지는 않는다. 신성에 대한 의식은 진보적인 영적 체험이다. [12:8.15]

우리의 목표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실체입니다.

우주의 개념적인 틀들은 오직 상대적으로 참이다; 그들은 확장되고 있는 조화우주 이해의 확대 앞에서 결국에는 길을 내줘야만 하는 유용한 발판들이다.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 도덕성, 윤리, 의무, 사랑, 신성, 기원, 실재, 목적, 운명, 시간, 공간, 심지어는 신(神)에 대한 납득도 오직 상대적으로 참이다. 하느님은 아버지 개념보다 아주 훨씬 더 크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개념이다; 사람은 하나의 필사자 우주 틀 안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그리고 더 높은 틀을 그려볼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15:1.2]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 조차도─마음과 물질 그리고 영의 우주에 대한 사람의 지적 접근도─어떤 신성하고도 최극의 이상을 가진 하나의 통합된 개념으로 병합되어야만 한다. 필사자 개인성이 인간 체험을 물질, 마음 그리고 영과 통합하듯이, 이 신성하고 최극의 이상은 최극위 안에서 힘-통합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다운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개인성구현 된다.
[56:10.15]

 
꼴라쥬 16-02-19
 
개인은 매 순간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설사 모습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같다고 해도, 개인성이 다르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와 역할과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해나 마찰이 일어날 여지는 늘 있은 셈이지요. 마음의 문을 닫으면 편견이 되고, 마음을 열면 서로 다르다는 것이 활기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바뀌지만, 쉽지가 않으니까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디오니스 16-02-19
 
동굴 속에서는 영원한 삶을 살아도, 헛된 일이겠지요. 플라톤의 이야기는 누구나 들었던 얘기입니다만, 대부분은 곧 잊어버립니다.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많은 교훈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편견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 자신은 동굴맨이 아니라고 믿기도 합니다. 자만심이 우리를 동굴에 가두는 족쇄인데, 눈과 귀가 동굴에 동화되어 있어서, 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너는 그 사실을 모른다"고 당당하게 자신의 무지를 밝힌 소크라테스는 고대의 현자였고, 21세기 현자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것을 내어 놓기가 바쁜 것 같습니다. 그 바람에 인류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만, "아는 것"을 중시하는 풍조 때문에, 좌절과 패배의 쓰라림으로 낙오하는 사람도 있고, 전쟁과 다툼도 있습니다.  암튼 시선을 돌려야만 합니다.

"유란시아 책은 인간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가본 적이 없는 세계를, 그곳에서 내려온 존재들이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하는 최대한의 범위 내에서" 진리적 실체를 계시하고 있다는 설명이 공감이 갑니다. 계시된 실체를 보기 보다는, 계시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분분한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네요.

소개하신 12편의 글을 읽으면서, 진리가 물질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영 발광체가 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네요. 그림자를 등 뒤의 배경으로 만들면서, 몸을 돌려 빛이 쏟아지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아직 동굴 안 인지, 바깥 경물에 낯선 것인지 모르겠지만, 편견이 사라질 수 있다면, 동굴은 일단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토파즈 16-02-19
 
좋으나 싫으나 현실에 익숙해진 사람은 동굴 속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해요. 자기 세상을 포기하고 낯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지요. 억지로 안돼요, 결심만 가지고도 안되고요. 운명인지도 몰라요.
불새 16-02-19
 
동굴에 갇혀 살다보면, 아마도 생각이나 행동이나 마음이나 화제가 온통 동굴 세상에 관한 것들이라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아지질 않을겁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동굴을 드나드는 멀쩡한 사람도 동굴 세상에서 동굴맨들과 같이 동굴 화제에서 딩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도 동굴 타입으로 변할 수 있겠지요. 시야도 금새 어둠에 익숙해져서, 밝게 어두움을 식별하던 감각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둔 곳에 들어가 보면, 얼마나 빨리 적응되는지 실감할 수 있지요.

지금 내가 동굴맨들과 즐겁게 보내고 있다면, 이곳은 동굴입니다. 동굴맨과 답답해서 말이 안 통하면 이곳은 바깥 세상이고요.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동굴 속에서 살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동굴맨은 실제로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적하신 것처럼,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분야에서는 동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굴맨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쉽습니다. 동굴맨은 플라톤의 지적처럼 편견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모든 걸, 자기 편견에서 생각하고 정의하고 말하고 해석합니다. 객관성이 거의 없습니다. 객관적인 사실, 증거, 사례를 활용하지만, 그런 것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자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편견을 가지면, 늘 주관적인 생각만 하게 됩니다. 대상에 집중하질 못하고 자기 생각을 전하는 데 급급하지요. 그러면서 개인성이 다르고 다양성을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양성과 개인성을 왜곡하는 것인데도, 동굴 안에서만 있다보니, 본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다양성은, 아름다움에서 다양하고, 참된 것이 다양하고, 선한 것이 다양한 것이라 알려줘도, 시끄러운 논쟁도 다양성의 하나라고 고집부리면서, 편견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주장이 그림자 밖에 모르는 동굴맨의 대표적인 특징이겠지요.

요즘 가만히 보면, 플라톤의 우화처럼, 여기저기서 빛을 보고 의식이 깨어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 중에서 "향기"가 배어나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유란시아 책으로 의식이 깨어나야만 합니다.

"지적 자아-의식은, 진리의 아름다움, 그것의 영적 본질특성을, 그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일관성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항상-현존하는 진리의 영의 어김없는 반응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은 진리를 인식함으로부터 생기는데, 이는 진리가 활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망과 슬픔은 실수 위에서 일어나는 데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체험 속에서 실체화될 수 없다. 신성한 진리는 그 영적 향기에 의해 가장 잘 알려진다."

나에게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진리가 삶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최경곤 16-02-20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우화입니다. 영적 실체를 찾고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려는 분들에게 무엇을 참된 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는 가장 곤혹스러운 질문일 것입니다. 진리는 설명이 아닌 영적 체험이라는 말처럼,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 오류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그러한 어려움을 알고, 지혜를 전하려고 했던 것이 같기도 하고요.
티거 16-03-01
 
실체를 언급하는 유란시아의 설명 중에 제게 가장 크게 와 닿고 늘 되새겨 보는 개념이 "그림자"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림자는 분명히 "보이지만" 사실 그림자는 빛이 존재하지 않는 부분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적이고 상대적인 차이일 뿐..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대비되는 "악"은 불완전한 존재에게만 선과 악으로서 상대적으로 대비되어 보이는 현상일 뿐...  절대적인 입장에서 악이라는 것은 그림자와 같이 상대적인 존재가 가지지 못한.. 단순 "없는" 부분이지만...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명확히 대비되어 나타나 보이는 현상입니다...  악은 늘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인 그림자로서 보여지는 비실체 입니다.

또한 물질 은 영 실체의 그림자 라고 하였습니다... 실체의 잠재일 뿐...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어렴풋이 개념을 잡아보곤 있습니다만...  이부분을 받아들이고 상상해보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만 물질존재로서 진정한 이해를 구하기는 애초에 불가능 하겠죠...
예수님의 진리 
중력파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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