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   16-05-22
불새   584
 

우리는 하느님에 믿음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에 신앙을 갖고 있는가?
 
일반적으로는 믿음과 신앙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널리 사용되는 일상용어이고 이에 반하여 신앙은 무언가 절대적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간혹 믿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믿음이나 신앙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에서는 믿음과 신앙이 엄격하게 정의되고, 영적 성장에서는 차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믿음은 상황에 따라서 변경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만,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믿음은 깨어질 때 실망이나 좌절을 경험하지만, 신앙이 깨어질 때 의식과 존재의 붕괴가 일어난다.

믿음과 신앙의 뚜렷한 차이는 절대적 실체나 존재가 있는가의 여부이다. 신앙에는 반드시 절대적 존재나 실체가 전제되지만, 믿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한글 사전의 풀이일 것이다.

신앙
1) 믿고 받드는 일.
2)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믿음과 유사)

믿음은 보통의 의식이나 마음을 의미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별도로 반드시 "받드는 일" 이나, "초자연적 절대자나 창조자"를 의식이나 마음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믿음은 자기의 생각에서 어떠할 것이 틀림없다는 마음이라서, 그 중심은 자기 자신이다. 반면에 신앙은 초자연적 절대자나 창조자가 그러하다는 마음이므로, 권위적 판단이기 보다는 겸손한 항복이다. 의식과 마음이 거칠었던 옛 시대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이러한 항복이 굴복이나 복종이나 무조건적인 숭배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참된 신앙에서는 항복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는 소망과 헌신을 의미한다.

원시시대부터 최근의 진화까지, 두려움과 복종의 원시적 신앙이 난무하였다. 강자가 힘으로 자신의 절대자를 내세우며 신앙을 통일하려고 시도해 왔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종교 그 자체가 충돌하거나 갈등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을 비난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러한 인종적 계파적 갈등과 충돌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새 계시 책은, 절대자 하느님, 우주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계시하고 있다. 이 신앙은 결코 원시 시대의 두려움의 신앙일 수가 없고,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나 강요되는 복종과 숭배는 더더욱 아니다. 새롭게 계시되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이 신앙은, 참되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을 고백하는 언어일 것이다. 믿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 그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38:8.8 예수유대인들이 가르쳤던 소위 말하는 착한 일에서의 회개와 왕국에 입장하는 값으로 요구되는 신앙에 의한 마음의 변화─새로 태어남─사이의 차이점을 자기 사도들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신앙만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요건이라는 것을 사도들에게 가르치셨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그리하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신앙이 하느님의 현존하는, 완전한 그리고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려있는 문”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처럼 말씀하지 않았다. 그는 권한을 가진 자로서 자기 자신의 말처럼 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에게 내주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과 구원의 은총을 만족하고 확신하는 실제적이며 개인적 체험을 찾는 것으로 향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셨다.

신앙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이는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과 그 사랑과 자비와 공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포가 있어야만 비로소, 영원한 사랑의 첫 마디를 실제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 그 어떤 의심이나 흔들림이나 방황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라면, 믿음으로 족하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 성정을 원한다면, 신앙의 차원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의심과 혼란과 방황을 사라지게 할 수 있고,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신앙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의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 사랑이 완전하다는 의식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저절로 마음을 변화시킨다. 자신의 습관과 마음을 다지는 경우는 있어도, 신앙 그 자체는 거듭되는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유란시아 책에서 우주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고 사랑하고 그로서 점점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칠중 하느님과 우주아버지에 대한 신앙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 유란시아 진리를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가? 아니면 책의 진리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혼란과 방황을 마침내 끝내는 계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언제까지나 새롭게 마음이 변화되는 원천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꼴라쥬 16-05-23
 
열심히 정독하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어서, 신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말씀에 작지만 소망을 품게 됩니다. 아직 제대로 이해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동반되는데, 믿음에서는 기도가 동기도 그렇고 내용도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막연한 생각힙니디만, 자연스럽고 진지한 기도가 신앙과 믿음을 구분하는 동기가 되지 않을까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디오니스 16-05-23
 
계시가 주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그동안 인류의 영적 성장을 이끈 진화 종교의 역할이 한계에 왔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달리 말해서 진화 종교의 신앙으로는, 참된 구원의 길, 영원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에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만약 유란시아 책이 있으나 없으나,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는 길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5번째 계시라는 속성은 전혀 공허한 주장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신앙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통 종교의 신앙과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처럼 참신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천사장을 비롯한 많은 신성한 존재들이 글을 내려준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독자마다 종교관이 다르니, 아무리 계시라도 일률적으로 제시하기가 불가능합니다만, 계시로 인한 신앙이 전혀 새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새로운 계시) 신앙이 기도와 관련된다는 꼴라쥬님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티거 16-05-25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믿음'에 관한 얘기를 할때 종종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아마도 그 자신이나 지지자들에게 지동설은 '믿음' 혹은 '확신' 정도였겠지요... 나름 자신의 과학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상황에서 유추했을 때 아마도 본인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경우에 대한 의식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고민하며 살다가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 대부분 지동설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가 지동설은 깊이 고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실' 로서 받아들입니다. 아마 극소수의 인류를 제외하곤 지구가 돌고있는것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직접 증명한 사실은 없지만 주변에서 그러한 '믿음'을 믿음이라는 단계를 넘어서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간접적인 체험을 하도록 이끄는 분위기(과학적 체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기독교의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며 믿음이 좋으니, 덜좋으니, 약해졌느니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전 주변사람들에게 전 믿음의 단계를 벗어나 진리를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니 저보고 믿음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차원낮은 얘기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면서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주장하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된것 같기도 합니다. ^^:)  지동설이라는 믿음이 500년간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듯 진리 또한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 누구나가 그러한 영적인 체험을 하는 기회가 비례하여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새님의 글을 읽다 보니 여지껏 단어적으로 특별히 구분짓지 않았던 믿음과 신앙의 차이가 컨셉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차이와 같은것 같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이전 글에 있었던 하나님과 하느님에 대한 글에서 처럼 상징언어의 미묘한 기호적 차이에 연연하진 말아야 겠습니다만 제 비유가 적절하다면 신앙이라는 단어의 믿을 信 자가 유란시아의 진리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저로서는 조금 마음에 안들긴 합니다.. ^^
     
디오니스 16-05-27
 
티거님 말씀처럼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유란시아 책의 특징같습니다.
그냥 읽고 잊어버리는 분도 있기는 하지만요.

전통 종교는 대부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훌륭한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논리적으로 진실을 밝혀주는 이 책은 다른 어떤 책과도 견줄 수 없습니다.

묻지마 믿음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몰아가는 종교 분위기로 본다면, 당분간은 지동설처럼 배척을 받을겁니다.
혹시 지동설처럼 자연스런 사실이 되는데 500년이 걸린다면, 정말 걱정이네요.
코너킥 16-05-27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말에 반발심이 들거나 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집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종교가 진리와 교리에 대한 의무와 복종을 요구하기 일수이니 부담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진리는 구속이 아니라, 자유라는 말도 있지만, 진정으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은 적습니다.

진리도 속박이 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어떤 진리도 결국 잊어야 진정한 자유라는 그릇된 생각에 빠지지요. 마치 사랑을 속박이라고 여기면, 사랑의 언저리에서 피상적인 감정만 즐기다가 시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진화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우리가 종교나 신앙에 얼마나 많은 피해와 억압을 받으면서 진화해 왔는지 가슴이 저릴 정도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인류는 그러한 진화 종교의 피해자인 셈이지요.

요즘 들어 언어에 대한 각자의 개념이 과거의 흔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전적 의미로 되돌아가 살피곤 합니다만, 신앙도 말씀하신대도 새로운 의식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길들여진 과거 관습에 굴복하지 않는, 도전의 하나라고 믿고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토파즈 16-05-27
 
믿음과 신앙은 천양지차예요. 믿음은 일상적 물질 세계에 한정된 말이고, 신앙은 진리의 하늘 세상과 이어지는 말이예요.
간증 
모두 내게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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