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느님에 믿음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에 신앙을 갖고 있는가?
일반적으로는 믿음과 신앙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널리 사용되는 일상용어이고 이에 반하여 신앙은 무언가 절대적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간혹 믿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믿음이나 신앙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에서는 믿음과 신앙이 엄격하게 정의되고, 영적 성장에서는 차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믿음은 상황에 따라서 변경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만,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믿음은 깨어질 때 실망이나 좌절을 경험하지만, 신앙이 깨어질 때 의식과 존재의 붕괴가 일어난다.
믿음과 신앙의 뚜렷한 차이는 절대적 실체나 존재가 있는가의 여부이다. 신앙에는 반드시 절대적 존재나 실체가 전제되지만, 믿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한글 사전의 풀이일 것이다.
신앙
1) 믿고 받드는 일.
2)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믿음과 유사)
믿음은 보통의 의식이나 마음을 의미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별도로 반드시 "받드는 일" 이나, "초자연적 절대자나 창조자"를 의식이나 마음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믿음은 자기의 생각에서 어떠할 것이 틀림없다는 마음이라서, 그 중심은 자기 자신이다. 반면에 신앙은 초자연적 절대자나 창조자가 그러하다는 마음이므로, 권위적 판단이기 보다는 겸손한 항복이다. 의식과 마음이 거칠었던 옛 시대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이러한 항복이 굴복이나 복종이나 무조건적인 숭배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참된 신앙에서는 항복은 자비와 사랑과 함께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는 소망과 헌신을 의미한다.
원시시대부터 최근의 진화까지, 두려움과 복종의 원시적 신앙이 난무하였다. 강자가 힘으로 자신의 절대자를 내세우며 신앙을 통일하려고 시도해 왔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종교 그 자체가 충돌하거나 갈등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을 비난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러한 인종적 계파적 갈등과 충돌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새 계시 책은, 절대자 하느님, 우주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계시하고 있다. 이 신앙은 결코 원시 시대의 두려움의 신앙일 수가 없고,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나 강요되는 복종과 숭배는 더더욱 아니다. 새롭게 계시되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이 신앙은, 참되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을 고백하는 언어일 것이다. 믿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 그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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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유대인들이 가르쳤던 소위 말하는 착한 일에서의 회개와 왕국에 입장하는 값으로 요구되는 신앙에 의한 마음의 변화─새로 태어남─사이의 차이점을 자기 사도들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신앙만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요건이라는 것을 사도들에게 가르치셨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그리하여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피하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는 “신앙이 하느님의 현존하는, 완전한 그리고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려있는 문”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처럼 말씀하지 않았다. 그는 권한을 가진 자로서 자기 자신의 말처럼 하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적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에게 내주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과 구원의 은총을 만족하고 확신하는 실제적이며 개인적 체험을 찾는 것으로 향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셨다. |
신앙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이는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과 그 사랑과 자비와 공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포가 있어야만 비로소, 영원한 사랑의 첫 마디를 실제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 그 어떤 의심이나 흔들림이나 방황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라면, 믿음으로 족하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 성정을 원한다면, 신앙의 차원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의심과 혼란과 방황을 사라지게 할 수 있고,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신앙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의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 사랑이 완전하다는 의식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환경에서도, 저절로 마음을 변화시킨다. 자신의 습관과 마음을 다지는 경우는 있어도, 신앙 그 자체는 거듭되는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유란시아 책에서 우주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고 사랑하고 그로서 점점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칠중 하느님과 우주아버지에 대한 신앙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 유란시아 진리를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가? 아니면 책의 진리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가? 마음의 혼란과 방황을 마침내 끝내는 계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언제까지나 새롭게 마음이 변화되는 원천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