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부활절   16-03-29
불새   692
 


게시판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엿보게 하는 글과 영상이 소개되어 있는데, 유란시아 책에서 계시하는 이 시대의 도전과 모험을 떠올리면서, 우리의 현실이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본인을 비롯한 모든 독자들의 목표일 것이다.

유란시아 책에서 계시하는 참된 부활의 의미는, 여량님의 소개한 인용문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이에 반하여 작금의 기독교가 각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부활은, 거의 정반대의 의미로 느껴진다. 부활은 "신앙이 악과 죄와 사악함을 반드시 이긴다."는 하늘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명백한 증거이고, 하느님이 모든 인간을 영원히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증표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류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진리로 이해하면서, 신앙의 모태이자 근원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진리관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당시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그가 다시 나타나자 온통 정신을 잃을 정도의 흥분과 격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배경은 191편을 비롯한, 부활 이후의 여러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사도들의 흥분이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진리의 영이 모든 사람을 휩쓸고 지나가는 사건이 일어나자,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진리에서 오는 확신과 용기로 새롭게 의식이 깨어났지만, 이것이 영적인 확신과 기쁨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절망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적인 흥분과 기쁨으로 격동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열광이, 영적 진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속성상 어쩔 수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 무엇보다도 그가 여러 번 미리 밝힌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떠올리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당시의 상황으로 이해하면 수긍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본인이 기억하기는, 유란시아 책도 이런 잘못을 개탄하고는 있지만, 진리를 배척한 어리석은 잘못이나 악으로 지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는 베드로의 잘못된 선언과, 바울이 확산시킨 예수님에 대한 종교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종교에서 예수의 종교로 바뀌는 것이, 유란시아 책이 선포하는 계시의 하나이다.

잘못된 예수님의 대한 종교의 핵심은, 부활이 인류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라는 진리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사랑을 멈춘 적이 없다는 진리가 예수님의 종교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용서를 구해야만 베풀어지는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으면서, 예수님이 밝히신 진리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정의하는 하느님 개념을 포기하려고 하질 않는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도들의 행적을 봐도, 사람이 올바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적고, 하느님에 대한 지식, 생각, 판단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만이 시대마다, 종파마다, 인종마다 계속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속성이며 한계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저절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진리의 영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유란시아 독자 사이에도 아마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리라 추측되는 부분이다.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고 참된 진리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스스로 절망에 사로잡히길 좋아하는, 인간의 나약하고 자학적인 감성을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하고 있는 진리가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의지이고, 그러한 의지적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자기 자신을 감성과 지성으로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없다면, 유란시아의 시대적 계시는 단지 지성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책이 될 뿐이다.

예수님에 대한 종교가 "비관론적인 절망의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194편 지적에서, 앞으로 하느님에 대한 종교 역시도 "비관론적인 절망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절망에서 시작되는 신앙은,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끝없는 평화와 사랑과 행복을 갈망하고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적 절망이나 기쁨은 모두 시간 속에서 절멸되는 것들이라는, 우주 법칙에서 본다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마찬가지로 사라진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을 194편에서는 한마디로 "원시적인 두려움과 공포의 종교"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나약한 속성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으니, 안일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유토피아님 동영상에 이헌 현실이 잘 나타나고 있다.

노래 제목인 'Still"은 성경 시편 46:10 에서 인용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성경을 찾아보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라는 말인데, 그러한 성경 문장이 어째서 "주 품에 품으소서."라는 고통과 절망에서 외치는 소리로 둔갑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성경 인용문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그런데도 노래 전체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왜곡되어 있다. 복종하고 애걸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이 피를 대신 흘리신 덕분이라는 믿음에서는, 할 말이 없다.

동영상 앞부분 자막에 다시 성경 요한복음 14:13이 나오는데 찾아보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108편 글에 나오는데, 전혀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바라는 하느님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느님의 실제적 모습을 신앙의 힘으로 올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하느님에 대해 감히 실제적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은 어무도 없다. 오로지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호소하면서 하느님을 찾고 진리를 찾고 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우리에게 남기신 진리가 있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깊이 새겨들어야만 할 진리일 것이다.

130:8.2 시라큐스에서 그들은 일주일 전체를 보냈다. 이곳에 그들의 멈춤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예수와 그의 동행자들이 머문 여인숙의 주인이었던, 타락한 유대인인 에즈라의 갱생이었다. 에즈라예수의 접근에 마음이 이끌렸고, 그래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 되고 싶지만, 하느님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절망을 하소연했다. 예수는 말하였다: “만약 네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아내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가 이미 네가 그를 찾아냈다는 증거이다. 너의 문제는 네가 하느님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니, 이는 아버지께서 이미 너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너의 문제는 단지 네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했던, ‘너희가 나를 전심을 다해 찾을 때, 너희는 나를 구하며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을 읽지 않았느냐? 그리고 또 그 선지자가 다시, ‘나는 너희에게 나를 알 수있는 가슴을 줄 것이고, 그리하여 내가 너희의 주님이니, 그리하여 너희는 내 백성에 속하겠고, 그리하여 내가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임을 알도록 하겠노라,'라고 쓴 것을 읽지 않았는가? 또한 너는 성서에, ‘그가 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리하여 혹시 누구라도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지었고 그리고 옳은 것을 왜곡하였고,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혼을 어두움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가 빛을 볼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을 읽지 않았느냐?” 그리고 에즈라하느님을, 자신의 혼의 만족에 이르기까지 찾아내었다. 후일에 이 유대인은 어느 부유한 그리스인 개종자와 연합하면서, 시라큐스에 첫 번째 그리스도교 교회를 건설하였다..

 
최경곤 16-03-29
 
요즘 들어 기복 신앙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 교회가 주변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이나 생활 수준은 높아지고 있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각박하다고 여기며 좌절을 겪는 사람이 늘어나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종교가 우선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니, 점점 더 퇴행을 겪는 것이지요.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유란시아 계시가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를 절망 속으로 몰아갈 것이 틀림이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원을 들어주고 기적을 베푸는 하느님을 찾는 세대가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파마다 참된 진리보다는 치유와 은총으로 복을 준다고 경쟁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악한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행복에 대한 갈증만 있고, 진리에 대한 갈증이 없다면, 위대한 진리도 소용 없겠지요.

계시가 전파되면, 기복 신앙이나 진리의 왜곡은 언젠가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여량 16-03-31
 
부활을, "원시적인 두려움의 종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옛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이나 미래의 얘기이니, 책의 가르침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잘 새겨들어야겠지요.

다만, 신앙의 본질이 순전히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원시적 두려움의 종교"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모습으로, 예수에 대한 종교인지 예수의 종교인지 말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소망의 근원이, 삶의 무거운 짐인지 아니면 분투하려는 갈망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행태로 교인들 개개인의 신앙을 일괄적으로 짐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몰아가는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곳에서 잠시 있다가 곧 떠나서 "참된 신앙, 희망, 사랑" 안에서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키워가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토파즈 16-04-12
 
부활은 눈에 봐야지만 천국을 믿는 당시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예요. 유란시아 책에서도 부활 자체는 당시 사람들의 어리석은 의식을 말하고요. 큰 의미를 두지않아요.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가르침에 큰 의미가 있어요.
사트바 16-04-18
 
유란시아 책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반복하여 읽어도, 늘 새롭게 의식을 깨우고 감동을 줍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쉬운데도,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것이 웬지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인지, 마음을 활짝 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어느 종교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 유란시아도 처음 만나는 분에게는 마찬가지로 시간이 걸리겠지요.

문제는 구원신앙이라는 고질화된 습관이 편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버리기를 거부하는 경우겠지요.
초록호박 16-04-20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불새님의 글이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유란시아서에서는 모든 종교에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진리가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상대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새님과 달리 저 개인적으로는 헛된 부활을 믿는 것이 답답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기독교의 폐해와 왜곡된 진리를 지적하지만 그 종교 안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혼이 성장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유란시아서가 있기 전에 이미 이러한 일들은 일어났고, 앞으로 유란시아서가 일반적인 환대를 받기 전까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유란시아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양분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싶습니다.
인간이 피해야 할 것은 왜곡된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속삭이는 생각조절자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란시어서를 알면서 선하지 않은 것보다, 유란시아서를 모르더라도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더 혼의 성장을 촉진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새님의 글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참된 신앙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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