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유 의지가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거의 절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도 많지만, 삶의 대부분의 성공이나 실패처럼 어떤 보람 있는 일들이나 후회되는 일들은 모두 의지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진실이나 사실을 무시하고 자기 의지만 내세울 때, 고집이다 편견이다 지적하고 조언을 합니다.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보니, 어떤 조언도 서로 상대방의 생각일 뿐이라고 고집 부리기도 합니다. 끝없이 다투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미리 서로 합의하고 약속한 기준으로, 누가 양보할지를 가리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질서와 법이 있는 것이지요.
자기랑 상의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법은, 따를 수 없다는 옹고집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은 상식선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요. 실제로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편견이나 옹고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조화롭게 지내려는 삶의 기본을 지키고 있고, 상대적으로 잘못이 나타나도,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에 따라 일시적 오해도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산 장사와 소금 장사처럼, 극명하게 이익이 상반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갈등이나 충돌은 오히려, 힘과 지혜를 모아서, 더 이상 불편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전하는 동기가 됩니다. 시대나 환경이 바뀌어도, 불편의 여지가 없도록, 미리 참신한 의견이나 창의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어가는 것이 문명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잠시 편견이나 고집이 있어도,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성을 다루는 세계는 얘기가 다릅니다. 절대성을 주장하면 서로 굽힐 수는 없으니, 결판날 때까지 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 세계이겠지요. 마호멧과 예수를 모두 다 선택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배교자가 되는 셈이지요. 종교에서 진리는 삶의 모든 것, 나아가 우주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관을 고치지 않으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우지 않으려면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유란시아 책은 완전한 영적 진리를 실체로서, 인간의 부분적인 해석과 미숙하고 불완전한 판단을 그림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체와 그림자에 대한 우화가 편견에 관한 가르침으로 종종 예시되고 있습니다.
실체를 직접 보기 전에는, 창의력이나 지혜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실체에 비해서 편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은 인간이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가본 적이 없는 세계를, 그곳에서 내려온 존재들이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하는 최대한의 범위 내에서, 진리를 실체로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글로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이해하는 한계를, 자신이 실감하는 실체를, 책이 계시하는 진리라고 선포하고 싶은, 자유 의지적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절대성을 주장하지 않는 한, 그러한 욕망은 살아있는 진리의 자연적인 역동성이라고 합니다. 다만, 실체를 만난 진정한 진리의 역동성인지, 아니면 편견인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와 탄성으로 더욱 확대되는 실체인지, 아니면 저마다의 편견으로 실체가 혼란스럽게 되는 것인지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굴 안에서 외치는 탄성과 기쁨은, 실체를 보면서 느끼는 탄성과는 어딘지 다를 것입니다.
동물적 게으름, 생명의 난폭성, 원시적 탐욕, 근시안적 선택, 물질적 투쟁, 맹렬한 야망, 원초적 감정, 파괴 본능, 평범한 안락, 무력한 타성, 악에 대한 변명, 환멸의 두려움, 소멸의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슬픔들은 어쩌면 우리를 가두고 있는 동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그렇게 겹겹으로 갇힌 동굴 속에서 태어나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림자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조화우주적 진화에 있어서 물질은 신성한 계몽의 영 발광체의 현존 안에서 마음에 의해 부어진 철학적 그림자가 되지만, 이것은 물질-에너지의 실체를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마음, 물질, 그리고 영은 똑같이 실제적이지만, 그것들이 신성의 달성에 있어서 개인성에 대해 똑같은 가치가 되지는 않는다. 신성에 대한 의식은 진보적인 영적 체험이다. [12:8.15]
우리의 목표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실체입니다.
우주의 개념적인 틀들은 오직 상대적으로 참이다; 그들은 확장되고 있는 조화우주 이해의 확대 앞에서 결국에는 길을 내줘야만 하는 유용한 발판들이다.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 도덕성, 윤리, 의무, 사랑, 신성, 기원, 실재, 목적, 운명, 시간, 공간, 심지어는 신(神)에 대한 납득도 오직 상대적으로 참이다. 하느님은 아버지 개념보다 아주 훨씬 더 크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개념이다; 사람은 하나의 필사자 우주 틀 안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그리고 더 높은 틀을 그려볼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15:1.2]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善) 조차도─마음과 물질 그리고 영의 우주에 대한 사람의 지적 접근도─어떤 신성하고도 최극의 이상을 가진 하나의 통합된 개념으로 병합되어야만 한다. 필사자 개인성이 인간 체험을 물질, 마음 그리고 영과 통합하듯이, 이 신성하고 최극의 이상은 최극위 안에서 힘-통합이 되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다운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개인성구현 된다. [5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