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시아 이전에, 지금까지의 사람의 운명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다. 필사자, mortal의 어원이 그러하듯, 인류의 정신세계는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왔으며, 그것을 위한 물음은 항상 나는 무엇인가? 이었다. 이 물음에 해답을 얻고자 노력했거나 해답을 제시했던 모든 사람을 위대한 철학자로 그리고 종교의 창시자로 부른다.
태초부터 이어진 인류의 운명을 생각해보라.
삶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던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외침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탈레스에서 시작되는 그리스 문명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 모든 철학자들의 몸부림은 유한 세계에서도 가장 유한하고,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하는 필사 존재, 필사자에 대한 절망만을 설명하고 확인했을 뿐이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실존과 존재를 끝없이 물으며 방황했던 위대한 지성들이 무슨 진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는가? 초월적 신마저도 자기포기로 선택해야만 마지막 도피였을 뿐이다. 그것은 필사자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필사자로서의 막연한 포기였다.
필사자로서 고뇌하며 처절하게 외치던 인간 존재성에 대한 절규, 죽음을 운명으로 여겨야 했던 철학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한다면, 철학자들의 비겁한 도피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들기도 했던 절박한 시대적 좌절을 알고 있다면, 필사자, mortal에 얽힌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절망이 배어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암흑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정신적 고립과 절망 속에서 비명만 지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까지 모두 필사자의 운명에 절망하고 자조했다. 하느님을 철학에 초대한 아퀴나스가 무슨 해답을 주었다는 말인가. 지적 만족을 위해 신을 이용하며 필사자 절망과 마주하길 포기했고, 기억상실증에 걸리려고 했을 뿐이다. 신비주의의 미치광이와 우상 주의의 신앙적 복종에 몸 맡기는 사막 같은 종교만 남겼을 뿐이다. 지금도 필사자로서의 절망을 마주하지 못하고, 신과 하느님의 허명을 부르짖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필멸의 끝이 있다는 유한한 운명,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러한 유한자가 유한을 초월할 수 있는 순수절대적 진리의 관념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유한자의 자기 모순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조화시키고 극복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이 인류가 겪은 정신적 고뇌의 역사이다. 필멸의 유한자의 자기 모순을 결국에는 절대자의 불멸의 진리에 의존하고 굴종해야만 하는 신학적 변명에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유란시아는 인류가 절망했던 필사자의 운명을 정반대로 바꾸어 놓았다. 유란시아는 필사자의 유한성은 결코 자기모순이 아니었고, 절대자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는 결정적인 관문이라고 제시했다. 모든 미물보다도 더욱 유한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필사자, 그 필사자의 운명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필사자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드러낸 최초의 체험적 실체였으며 최후의 존재적 실체임이 묘사되며 밝혀지고 있다. 필사자는 허무의 증거가 아니라, 진리의 실증이며 영원과 무한의 증거임을 생생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보다 큰 기쁨과 복음이 존재할 수 없다. 이 진리는 유란시아를 읽는 사람이 누리는 영원한 운명의 시작일 것이다. 위대한 철학가들이 남긴 슬픔과 고통과 좌절은 유란시아 필사자의 축복과 기쁨과 소망을 밝히기 위한 필연적인 희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사자의 운명을 부러워하고, 그 운명을 같이 하려고 애쓰는 천상의 존재가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누구인지 유란시아를 읽은 사람은 그 답을 알 것이다. 그리고 전율을 느낄 것이다.
[이 글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09-14 독자 게시판 불세님의 글을 복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