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include_once(G5_MOBILE_PATH/head.php): failed to open stream: No such file or directory in /home/urantia91/www/head.php on line 10 Warning: include_once(): Failed opening 'G5_MOBILE_PATH/head.php' for inclusion (include_path='.:/usr/share/pear:/usr/share/php') in /home/urantia91/www/head.php on line 10

우주 아버지는 모든 창조의 하느님이시며, 모든 사물과 존재의 첫째근원이며 중심이다. 하느님을 창조주로서, 다음에는 조정자로서, 그리고 맨 나중에는 무한한 유지자로서 생각하라. 예언자들이 "하느님, 당신은 홀로 계시며 ;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창조하셨고 또한 하늘들의 하늘을 그곳의 모든 무리들과 함께 창조하셨으며 ; 이들을 보존하고 조정하십니다. 모든 우주가 하느님의 아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창조주는 빛을 옷으로 삼아 자신을 두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 휘장처럼 하늘을 펼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우주 아버지에 대한 진리가 인류에게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오직 우주아버지의 개념─많은 하느님들 대신 오직 한 분 하느님 개념─만이 필사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신성한 창조주와 무한한 조정자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우주 아버지는 개인성의 하느님이다. 개인성에서의 가장 낮은 지위인 필사자 인간, 곧 물질 창조체로부터 가장 높은 개인이신 신성한 지위에 계시는 존엄하신 창조자까지 모든 우주 개인성의 권역(權域)은 그 중심과 테두리를 우주 아버지 안에 둔다.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개인성의 증여자인 동시에 보존자이시다. 그리고 낙원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신성한 뜻을 행하기로 전심으로 선택한 모든 유한한 차원의 개인성들,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의, 그 운명이다.

하느님은 영 세계의 최초 실체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마음이 펼치는 모든 영역에서 진리의 근원이다; 물질 영역에 두루 모든 것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모든 창조된 지능존재들에게 하느님은 한 분 개인성이시고, 우주들의 우주에게 하느님은 영원한 실체의 첫째근원인 동시에 중심이다.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도 아니지만, 기능적 구조체의 모습도 아니시다. 첫째 아버지는 우주의 영이고, 영원한 진리이며, 무한 실체이고, 아버지로서의 개인성이시다.

영원한 하느님은 이상화된 실체 또는 개인화된 우주보다도 더 무한하다. 하느님은 단순히 사람이 픔을 수 있는 최극의 욕망이거나, 필사자가 추구하는 대상으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단지 모든 정의(正義)로운 것을 무한히 잠재하고 있는 힘이라는 그러한 어떤 개념도 아니다. 우주 아버지는 우주 자연과 동의어가 될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이 개인성으로 현현된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최극 가치에 대한 사람의 전통적 개념이 아니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초월적 실체이시다. 하느님은 심리적으로 초점화시킨 영적 의미의 총합이 아니며,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고귀한 작품"도 아니다. 비록 하느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최고의 개념들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다. 그는 이 땅에서 영적 평화를 누리고, 죽음에서 개인성의 생존을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생존을 보장하는 개인이시며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이시다.

나는 영원자로 부터 왔고, 우주 아버지가 현존하는 곳에 반복하여 되돌아갔었다. 나는 첫째근원이며 중심인 영원하고 우주적인 아버지의 실제성과 개인성에 대해 알고 있다. 나는 위대한 하느님이 절대이고 영원하며 그리고 무한하며 또한 그는 선하며 신성하며 그리고 자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위대한 선언들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느님은 영"이고 "하느님은 사랑"이며, 이 두 속성들은 영원 아들 안에서 우주에 가장 완벽하게 밝혀져 있다.

이 글은 본문 [1편 0.1] , [5 편 6.1] , [1 편 2.1] , [1 편 2.1], [1 편 3.8]의 일 부분입니다.



너희의 모든 고통 속에서 그가 고통을 받고 있고,"너희가 승리하는 모든 순간에서 그도 너희 속에서 그리고 너희와 함께 승리한다"라는 말은 정말로 사실이다. 그의 전(前)개인성 모습의 신성한 영은 실제로 너희의 일부분이다. 낙원 섬은 우주들의 우주의 모든 물질 차원의 변화에 응답한다; 영원 아들은 모든 창조 세계의 모든 영적 움직임을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공동 행위자는 팽창하는 조화우주에서 모든 마음의 표현들을 함유하고 있다. 우주 아버지는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전체 진화하는 창조 세계의 모든 실존개체, 존재, 개인성의 상승하는 영, 그리고 확대하는 마음이 체험하는 점진적 투쟁이라는 그 개별적 경험 전체를 신성한 의식의 충만함 안에서 실제화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에 정말로 사실이다.

창조자는 사람들이 신성한 법칙들을 어리석게 위반함으로써 생기는 비참한 결과가 생겼을 때, 그 결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려는 시도를 가장 먼저 하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아버지로서의 애정이다 ; 따라서 그는 때로 "우리가 그의 거룩함을 함께 하는 자가되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역경에 있게 한다." 너희가 불같은 시련에 받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모든 고통 속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이 글은 본문 [글 2편 5.3] [글 1편 5.16]의 일 부분입니다.



하느님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신성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 또한 어떤 존재가 변화의 부침을 겪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진화하는 창조체들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어떤 일정한 환경에 처하게 된다. 다음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 :

1. 용기─성격이 강인해지고 또 힘이 넘치는 것─
용기라는 것을 가지고 싶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만약 그렇다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려움도 만날 수 있고 그리고 또 실망스러움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정한 환경에서 성장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2. 애타심─자기 이웃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는 것─
애타심은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삶에서의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의 어떤 불평등과 부딪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된다.

3. 희망─굳건한 믿음에서 나오는 위대하고 웅대한 것─
희망이라는 것을 늘 품고 싶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인간 존재가 살아가는 현재는 항상 불안하고 또 되풀이되는 의문에 계속해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4. 신앙─인간의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결심─
신앙을 갖고싶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은 어떤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늘 부족하게 알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 믿을 수 있는 그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5.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이 이끄는 데로 어디든지 기꺼이 가보려는 마음은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은 실수가 존재하고 항상 허위가 있을 수 있는 세상에서 자라나지 않으면 안된다.

6. 이상주의─신성한 대상에 다가가려는 마음─
이상주의는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은 선(善)과 미(美)가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그래서 더욱 높은 곳에 도달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나는 그러한 환경에서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7. 충실함과 의리─가장 높은 본분을 지키는 전념─
충실함과 의리는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은 배반과 이탈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뿌리치고 견디어 내야만 한다. 의무에 전념하는 용기에는 불이행이라는 위험이 존재해야만 한다.

8. 사심없는 태도─자기를 잊는 정신─
사심없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은 자기자신이 인정받고 또한 명예를 얻으려고 끊임없이 외치는 피할 수 없는 이기적인 함성과 마주하며 살지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만일 버리고자 하는 자기자신만의 생활이 없다면, 신성한 삶을 힘차게 선택할 수가 없다. 만일 선(善)이 차별되어 드러나고 드높여질 수 있는, 어떤 잠재적인 악(惡)이 없다면 사람은 결코 정의(正義)위에 구원의 발판을 놓을 수가 없다.

9. 기쁨─행복에 대한 만족감─
기쁨은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 그렇다면 사람은 자기에게 가능해지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기쁨과 대비되는 고통이나 고난이 가능할 수도 있고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

예수가 마지막으로 가디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선(善)과 악(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팔레스틴 청년은 세상에 선과 악이 나란히 존재하는 부당함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시다면,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악으로 인한 슬픔을 겪게 내버려두시는지요? 도대체 악은 누가 만들어낸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과 악을 같이 창조했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었지만, 예수는 그같은 잘못된 가르침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의 형제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은 반드시 선할 수밖에 없다; 그 분의 선함은 너무나 위대하고 온통 사실이므로, 아무리 작은 악이 사실로 들어설 수가 없다. 하느님은 너무나 적극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잠재적인 악도 남아있을 여지가 절대적으로 없다. 악은, 선에 저항하고 아름다움을 거부하며 진리에 불충하는 무리들의 성숙되지 못한 선택이며 경솔한 과실이다. 악은 단지 미숙(未熟)함을 오용한 것이거나, 혹은 무지(無智)로 인한 파괴적이고 왜곡된 작용일 뿐이다. 악은 어리석게 빛을 거부한 결과로 수반되어 어쩔수 없이 따라오는 필연적인 그림자이며 그 어두움이다. 악은 어둡고 거짓된 것이며,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의적으로 인정할 때에만 죄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3 편 5.5] [글 130 편 1.5]의 일 부분입니다.



예수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였다. "너희의 모든 고통들 안에서 나도 고통을 받는다. 하느님은 아버지로서의 이해심 그리고 동정심 가득한 이해심을 의심할 여지없이 경험하고 계신다; 그 분은 정말로 괴로워하실 수 있지만, 나는 우주 아버지가 경험하시는 그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의 조언이나 욥 자신의 마음을 지배했던 하느님에 대한 실수 때문이라는 관념에서 비추어볼 때, 누가 욥의 태도에 도전할 수 있는가? 욥은 인간으로서의 하느님을 갈구하고 있었으니, 욥이 사람의 처지를 알고, 낙원을 향한 긴 상승을 위한 이 첫 번째 삶의 일부분으로서 때때로 올바른 자가 결백한 가운데 고통 받아야 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신성한 존재와의 교제에 굶주렸다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그런 까닭으로 인하여 사람의 아들이, 이제부터 욥의 고통을 참으며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하는 모든 이를 위로하고 구조할 수 있도록, 육신을 입고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기 위하여 아버지로부터 내려왔다."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의 끝이 왔을 때, 더욱 멋지고 더욱 아름다운 형체를 위하여, 그리고 다시는 두려움도, 슬픔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죽음도 없는 그곳, 최극자와 불멸자의 영역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주저하지 말고 육신의 몸을 벗어버려라.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죽음과 이어진 그 마지막 끈을 자르는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3 편 6.6] [글 148 편 6.7] [글 131 편 4.7]의 일 부분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성실하게, 더욱 성실하게 그리고 더욱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열쇠를 갖고 있다. 사람은 결심으로, 더욱 결심으로, 그리고 더욱 더 결심으로─영적 차원의 진보에서─ 이것을 사용한다. 가장 높은 도덕적 선택은 가장 높은 가능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며, 이것은 항상─어떤 구체에서든지, 모든 전체에서─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렇게 선택하면, 그가 예루셈에서 가장 낮은 자일지라도, 아니 비록 유란시아의 필사자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이더라도 그는 위대하다.

이 글은 본문 [글 39편 4.14] 의 일 부분입니다.



사람의 혼에는 영적인 행동과 실천 뿐만이 아니라 영적 양식도 필요하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 절대 주권자로서 실제로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 안에서 명상을 하고 신성한 의미와 영적 가치의 실체들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결코 현세에서의 문제들을 현명하게 결정하거나 자신의 관점에서 오는 이기심을 초월할 방법이 없다.

명상은 마음과 영이 서로 접촉하도록 한다; 정신적 긴장이 이완될 수록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용량이 결정된다. 또한 경배는 약한 것을 강한 힘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자기 자아의 마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교체하도록 이끈다. 이것이 철학자가 경배와 명상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가 너무 바빠서 영적인 명상과 종교적인 어떤 일심(一心)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91편 7.2] [글 99편 7.4] [글 160편 3.1] [글 195편 6.7]의 일 부분입니다.



생명운반자들에 의해 식물과 동물에게 증여되어진 생명은 식물이나 동물이 죽었을 때 어떤 곳으로도 되돌아 가지 않는다. 살아있는 물체로부터 떠나가는 생명은 정체성도 없고 개인성도 없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는 개별적으로는 죽음에서 살아남지 않는다. 생명은 살아서 실제로 존재하는 동안 그리고 그것이 물질로 이루어진 몸체 속에 머물렀을 때, 변화를 겪는다; 생명은 에너지 진화를 겪은 후 우주 기세의 한 부분으로서만 남는다; 그것은 개별적인 생명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피조물들이 다시 살아남는 것은, 전적으로 그 필사존재의 마음 안에 불멸하는 혼이 진화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 날 오후 예수와 가니드는 아주 영리한 양치는 개 한 마리와 즐겁게 놀았는데, 가니드는 문득 개도 혼을 갖고 있으며 의지를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니드가 예수에게 질문을 하자, 예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개는 자기 주인, 물리적 존재를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마음은 갖고 있지만, 영(靈)이신 하느님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개는 영적 본성을 갖고 있지 않고 영적인 경험도 즐길 수 없다. 개는, 본능에서 나오고 훈련으로 개발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마음의 힘은 영적 기세가 아니며, 뿐만 아니라 어떤 가치에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고상하고 도덕적인 의미들을 분별한 결과가 아니며,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선택한 결과도 아니다 , 그래서 인간의 의지와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필사자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존재, 영적 책임을 갖는 속성과 영원한 생존의 잠재력을 지닌 창조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영적 분별력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물에게는 그런 정신력이 없기 때문에 언어를 발전시킨다거나 영원 속에서 생존되는 개인성이 겪는 그러한 경험들이, 영원토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여서 설명하였다. 그 날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가니드는 사람의 혼이 동물의 몸으로 다시 윤회된다는 믿음을 다시는 갖지 않게 되었다.

이 글은 본문 [글 36편 6.5] [글 130편 2.8] 의 일 부분입니다.



자기 앞에 새롭거나 어떤 심각한 결정을 해야 할때, 아버지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영과 가지는 교제를 위하여 조용히 물러나 있는 것은, 예수께서 항상 해오던 습관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내적인 삶을 하느님─내적인 의미-가치가 가능하도록 그렇게 창조체의 삶을 만든 바로 그 하느님─과 기꺼이 나누겠다는 창조체의 표현에 불과하다. 함께 나눈다는 것은 하느님 같음─신성함─이다.

비록 너희는 지금 당장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겠지만, 만일 너희가 내주하는 영의 인도를 따르면, 한 걸음 한 걸음, 반드시 인도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계속 이어져 지속되는 것─생존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우주 기능, 하느님을 발견하려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바로 눈앞에 있는 생명의 빵을 발견하지 못하고 굶주려서 죽어가는 배고픈 혼들로 가득하다; 자기 안에 살아계신 바로 그 하느님을 찾다가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은 본문 [글 136편 4.8] [글 111편 5.1] [글 2편 5.5] [글 132편 3.7] [글 159편 3.8] 의 일 부분입니다.



네가 영적인 통찰력의 축복을 받게 되면, 네 일에 매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마음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을 찾고 영원한 실체를 추구하도록 인도하는 그러한 목적에 네 삶을 바치기 바란다.

거룩하지 않은 직업도 있고 세속적인 직업도 있다. 그러나 영으로 인도된 삶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 그것은 진리에 복종되고 사랑으로 고귀해지며 자비에 지배되고 공정함─공의─으로 절제되어진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이 세상에 보낼 영은 진리의 영일뿐 아니라 이상적인 미(美)의 영이다.

영원에 거하는 우주 아버지로부터 최상의 명령이 내려졌다,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하라." 낙원의 전언자들은 사랑과 자비로써 이 간곡하고도 신성한 권유를 여러 세월에 걸쳐 아래쪽으로 그리고 여러 우주를 거쳐 바깥쪽으로, 심지어는 유란시아의 인종들과 같은 하등의 동물-기원 창조체에게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이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하라."라는, 신성한 명령의 진정한 의미로, 이는 필사자 사람이 더욱 더 높은 차원의 영적 가치와 진정한 우주 의미들을 달성하도록 하는 길고도 황홀한 투쟁에서 앞으로 나가도록 계속 촉구하고 그리고 그를 안쪽으로 손짓하여 부른다. 우주들의 하느님을 찾기 위한 이 숭고한 탐구는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모든 세계들의 거주자가 갖는 최극의 모험이다.

인간 자아-실현의 목표는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이어야만 한다. 분투할만한 가치를 갖는 유일한 실체들은 신성하고 영적이며 영원한 것들이다.

이 글은 본문 [글 181편 2.20] [글 155편 6.1] [글 1편 0.3] [글 1편 0.6] [글 100편 2.6] 의 일 부분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종족의 역사는 점진적인 진화의 하나이며, 아담의 증여는 인류를 그 이전의 생물학적 조건으로부터 크게 개량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너희가 하느님의 관념을, 예수께서 항상 가르쳤던 유일한 개념, 곧 진실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일단 파악되었다면, 너희가 하느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원시적 관념을 당장에,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아주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시적 관념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들이 잘못하는 것을 늘 따져보고 탐지하고, 그들이 합당하게 벌받는 것을 보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의 하느님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어떤 존재가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 받기를 자원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대리로 죽는 것을 중요한 기쁨으로 여기는, 그러한 화내는 주권자, 엄격하고 전능한 지배자로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희생 제물과 고행을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는 피를 흘림으로, 성난 하느님을 달래고, 감정이 상한 주(主)의 비위를 맞추고, 신(神)의 은혜를 얻으려는 야만스러운 관념은, 전혀 미숙하고 원시적인 종교를 대표하며, 과학과 진리로 깨우친 시대에 맞지 않는 철학을 대표한다.

"그러나 나의 아들아,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만 한다. 사람이 신성한 뜻인 더 좋은 길에서 걸어갈 것을 끈질기게 거절한 결과로서 불필요한 고통을 그 자신 위에 넘어트리고 있을 뿐이다. 고통은 악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이 죄와 사악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많은 예외적인 사건이 이 세상에서 일어났고,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목격하는 고통과 고난의 광경으로 혼동되어 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의 한 가지는 확실한데: 아버지께서 잘못된 행위에 대한 벌로써 고난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완전성과 악이라는 장애는 선천적이며, 죄에 대한 벌은 피할 수 없으며, 사악이 파괴되는 결말은 피할 수 없다. 사람은 그가 선택한 삶의 자연스런 결과인 그러한 고통들에 대하여, 하느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삶의 한 부분인 그러한 경험들에 대하여, 불평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필사자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그의 상태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끈질기게 그리고 일관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지능적 적응은 사람이 자신의 이 세상에서의 비참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런 후에 예수께서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의 자식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첫째로,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와 그리고 미숙한 육체적 실재라는 악(惡)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다. 그 다음으로, 냉혹한 죄의 결과─생명과 빛의 법칙을 어김─로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천국의 정의(正義)로운 원칙에 대하여 반역함으로써 자신이 뿌린 지속적인 사악함에 대한 결실을 거둔다. 그러나 사람의 비참함은 신성한 심판이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현세의 고통을 훨씬 감소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악한 자의 요청에 따라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힌다는 미신으로부터 단호하게 구제될 수있다.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선한 사람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졌는 지, 욥기를 읽어 보라.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고난받은 욥까지도 어떻게 하여 위안과 구원의 하느님을 발견했는지 유의하라. 마침내 그의 신앙은 치유의 자비와 영원한 정의의 아버지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생명의 빛을 알아보고 고통의 구름을 뚫고 나갔다."

이 글은 본문 [글 75편 8.2] [글 188편 4.8] [글 4편 5.4] [글 148편 5.3] [글 148편 6.11] 의 일 부분입니다.



충실한 사람들은 성장하는 사람이다;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실체이다.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라.-성장하라-. 그리고 내일은 내일대로 그 자체에 힘을 다하라.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매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다.

살아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려는 시도보다 더 만족스럽고 감동적인 모험은 단 한가지뿐임을 잊지 말아라. 그것은 신성한 뜻을 진정으로 행하고자 하는 최극 경험이다. 또한 하느님의 뜻은 이 세상의 어떠한 직업을 통해서라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거룩하지 않은 직업도 있고 세속적인 직업도 있다. 그러나 영으로 인도된 삶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 , 그것은 진리에 복종되고 사랑으로 고귀해지며 자비에 지배되고 공정함─공의─으로 절제되어진다.

약한 자는 결심하는 것에 탐닉하지만 강한 자는 행동한다. 삶은 오직 하루의 일이다─그것을 잘 하라. 행동은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하느님의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만일 자아탐구나 자기연민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에서 벗어난다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가지처럼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100편 1.4] [글 155편 6.11] [글 48편 7.13] [글 48편 6.26] 의 일 부분입니다.



이 구체는 여전히 부분적인 영적 격리 상태에 있으며, 그들의 봉사에 필연적인 순환회로들 중 일부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너희 세계가 관련된 반향적 순환회로들에게 한 번 더 반환될 때, 행성간의 그리고 우주간의 통화를 이루는 활동의 대부분은 크게 단순화되고 촉진될 것이다.

모든 탈퇴 선전은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수행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왜냐하면 방송 서비스와 다른 모든 행성간 통화 경로들이 체계 순환회로 감독자들에 의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폭동이 실제적으로 발발하자, 사타니아 전체 체계는 별자리에서 그리고 우주 순환회로들에서 모두 고립되었다. 이 시기 동안 모든 출입 메시지들은 성(聖)천사 기관들과 단독사자들에 의해 보내졌다.

그러나 머지 않아, 루시퍼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판결이 사타니아 체계를 놀라시아덱 별자리로 회복시킬 것이며, 그 후에, 유란시아 그리고 고립된 다른 구체들은 사타니아 순환계들로 회복될 것이며, 그러한 세계들은 행성간 통신과 체계간 교제의 특권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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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아버지의 멀리 퍼지는 창조의 광대함은 유한 상상력에 의한 이해의 범위를 철저히 벗어난다; 주(主)우주의 거대함은 심지어 나와 같은 계층의 존재의 개념으로도 어렵다. 그러나 필사자 마음은 우주들의 계획과 배열에 관해 많이 배울 수 있다; 너희는 그것들의 물리적 조직과 놀라운 관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너희는 시간의 일곱 초우주들과 영원한 중앙 우주에 거주하는 지능 존재들의 다양한 집단들에 관해 많이 배울 수 있다.

그 초우주들에 관한 거대한 지식 덩어리 중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해주기를 거의 바랄 수도 없다, 그러나 물리적 그리고 영적 기세들에 대한 지능적 조정의 기법이 이들 영역에 두루 작용하고, 그리고 우주 중력(重力) 현존이 웅대한 힘과 완전 조화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그 초우주 영역들의 물리적 구성과 물질적 조직에 대한 적절한 개념을 먼저 얻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너희가 그것들의 영적 정부(政府)를 위하여 그리고 이 일곱 초우주들에 두루 여기저기에 분산된 거주되는 무수한 행성들에 거하는 의지적 창조체들의 지적 전진을 위하여 제공된 놀라운 조직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더 잘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행성 체계들은 모두 결국에는 여러 종류의 많은 지능(知能)창조체들,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신성한 애정을 받아들이고, 보답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이 거주되도록 만들어졌다. 우주들의 우주는 하느님의 작품이며 그의 다양한 창조체들이 사는 곳이다. "하느님이 하늘들을 창조하셨고 땅을 빚으셨으며; 하느님이 우주를 세우셨고 이 세상을 헛되이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거주되도록 그것을 빚으셨다."

오직 우주 아버지만이 공간 속의 거주되는 세계들의 위치와 실제적 숫자를 안다; 그는 그것들 모두를 이름과 숫자로 부른다.

지역우주는 미가엘이라는 낙원 계층의 창조주 아들의 작품이다. 그것은 100개의 별자리들을 포함하는데, 그 각각은 거주되는 세계들이 있는 100개의 체계들을 갖는다. 각각의 체계는 결국에는 약 1,000개에 달하는 거주되는 구체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수백만의 거주하는 세상들에서, 도덕적 투쟁을 포기하고 신앙의 선한 싸움을 단념하도록 유혹 받을 수 있었던 진보하는 수십 조에 달하는 창조체들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나서, 사람의 애타적인 봉사에 헌신으로 그의 육신화 생명을 버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고무(鼓舞)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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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자기 사도들에게, 인간 존재들로부터 떠나간 영들이 그들의 생존되고 있는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그들이 있었던 기원적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설명하셨다. 다만 한 섭리 시대가 지난 다음에야, 필사자 사람의 진보된 영이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이고 그 행성의 영적 행정의 한 부분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도 그들은 인간이 기원된 세계를 향하여 뒤쪽으로 너희를 운송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사자는 자신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그 세대 동안 자신의 고향 행성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으며, 만일 그가 그 다음 세대 동안 되돌아가야만 한다면, 그는 우주 본부 집단의 운송 성(聖)천사에 의해 호위를 받을 것이다.

사람의 내적 경험 속에서, 마음은 물질과 결합되어 있다. 물질에-연관된 이러한 마음은 필사자의 죽음에서 생존할 수 없다. 생존의 기법은 인간 의지의 그러한 조절들 안에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식 지성이 점차적으로 영의 가르침을 받고 결국에는 영의 인도를 받게 되는 필사자 마음 안에서의 그 변환들 속에 포옹되어 있다. 물질 연합으로부터 영 결합을 향한 인간 마음의 이 진화는 필사마음의 잠재적인 영 위상을 불멸의 혼인 모론시아 실체들로 변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질에 종속된 인간 마음은 점점 더 물질적으로 되는 운명에 있고 결국되어지는 개인성의 소멸을 당한다; 영에 종속되는 마음은 점점 더 영적으로 되는 운명에 있고, 궁극적으로 생존시키고 인도하는 신성한 영과 하나됨을 성취하며, 이런 식으로 해서 개인성 실재의 생존과 영원을 달성하게 되어 있다.

부유한 것 자체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재물을 사랑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천국에 대한 영적인 충성심은 물질적인 부(富)에게 노예가 된 상태와 양립할 수 없다. 사람은 영적 이상(理想)에 대한 최극 충성심을 물질적 신앙과 함께 나눌 수 없다.

예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말고, 매일 매일의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그리고 나를 따라 오라. 누구든지 이기적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지만,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 자기 자신의 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영원한 삶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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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종교는 주로 물질적인 가치를 인식한다; 문명이 종교적 가치들을 증진시켰는데, 왜냐하면 참된 종교는 의미 있고 지고(至高)한 가치들을 갖는 일에 자기를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 윤리는 도덕의 철학이 되고, 도덕성은 최고의 의미들과 지고한 가치들─거룩하고 영적인 이상(理想)들─의 기준에 의해서 자아를 훈련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종교는 자발적이고 정교한 헌신, 사랑의 충성심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 된다.

제도적인 종교는 지금 절박한 전 세계적 사회 재건과 경제적 재조직에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없고 지도력도 제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그것은 많거나 적거나 다소간, 반드시 재건을 겪어야하는 운명을 가진,그 사회 계층과 경제 체계에서의 유기적인 부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개인의 영적 경험의 참 종교만이 문명의 현재 위기에서, 유용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모두 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왔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 안에 좀 더 큰 진리, 많은 후세의 선지자들 역시 파악했던, 하느님께서 너희─너희 각자─를 개인들로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너희 이 모든 세대들은 국가적이거나 인종적인 차원의 종교를 가져 왔지만; 이제는 내가 개인적인 종교를 너희에게 주려고 왔다.

동물적 진화 기원에 대한 사실은 그것이 두 가지 근본적인 유형의 유한 지능적 의지 창조체들 중 하나를 낳는 독점적인 방법인 것처럼 우주의 판단으로 모든 개인성에게 오점(汚點)을 남기지 않는다. 완전성과 영원의 높이가 달성되었을 때, 바닥부터 시작하여 즐겁게 삶의 사다리를 차례로 상승하는 그들에게 더 큰 영광이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영광의 높이에 도달하였을 때 바닥으로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삶의 위상의 실제적인 지식을 구체화시키는 개인적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92편 7.5] [글 99편 2.1] [글 145편 2.4] [글 92편 3.10] 의 일 부분입니다.



유란시아에 있는 종교들 대부분은 사람을 하느님에게 데려다 주고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실감성을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데에 모두 다 좋다. 어떤 종교가의 집단이라도 자기들의 교리만이 진리라고 착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태도들은 신앙적인 확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인 오만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모든 신앙 속에 담겨 있는 최고의 진리들을 유익한 방향으로 연구하고 흡수하지 못할 유란시아 종교는 하나도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교들이 진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들은 자기 이웃들의 질질 끌려오는 맹신과 케케묵은 의식(儀式)에 있는 가장 나쁜 것을 헐뜯기보다는 자기 이웃이 갖고 있는 살아있는 영적 신앙 안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빌려온다면 아마 훨씬 나아질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92편 7.3]의 일 부분입니다.



동물에서 진화적으로 되어진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개인성에게도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두 가지 근본유형의 유한한 지능의지 창조체 중 하나를 생산하는 배타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완전과 영원의 높이에 달성되었을 때,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즐겁게 삶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한 자들에게 더욱 큰 명예가 주어지며, 그리고 그들이 영광의 높이에 도달하였을 때는 밑바닥으로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삶의 위상의 사실적 지식을 형태로서 구현하는 개인성 경험을 얻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32편 3.10]의 일 부분입니다.



너희 행성은 거대한 조화우주의 일원이다; 너희는 거의 무한한 가족 세계들에 속하지만, 그러나 너희 구체는 모든 현존에서 마치 유일하게 거주되는 세계인 것처럼 정확하게 관리되고 사랑스럽게 양육되고 있다.

인간 종족의 진화는, 공간의 세계에서 일단 시작되고 나면, 그 행성의 물리적 생존과는 전혀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 틀림없다.

유란시아는 이러한 고양(高揚)된 이상(理想)들의 실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문명화된 인종들이 태동되고 있다─인류는 보다 높은 진화 목표들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진리의 영을 부어주는 일은, 증여된 세계의 인간 종족들에게 크게 진전된 유익(有益)을 실현시키는 영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유란시아는 그 법률들, 절차들, 상징들, 관습들, 그리고 언어를 통하여 행성 정부를 더욱 가까운 장래에 실현할 수 있도록 훨씬 잘 준비되어 있다─그 모든 것들은 법률에 의거한 범세계적 평화 수립에 크게 기여할 수 있고, 언젠가는 참된 영적 분투의 시대가 태동되도록 인도할 것이며, 그러한 시대는 그 행성이 빛과 생명의 이상적인 시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이 글은 본문 [글 15편 14.9] [글 51편 2.3] [글 71편 8.15] [글 72편 12.5]의 일 부분입니다.



기도하는 경험 속에서의 초(超)자아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제외한다면, 윤리적인 기도가 한 사람의 자기를 증진시키고 그 자아로 하여금 보다 나은 삶과 보다 높은 달성을 강화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도는 인간 자아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필사자 경험의 잠재의식 저장소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과, 영적인 존재, 신비 감시자와 물질적인 존재가 접촉하는 초의식적 경계선에 이르도록 하는 통찰력과 안내가 그것들이다.

기도는 행동을 대치시키게 될 만큼 악용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모든 윤리적인 기도는 행동에 대한 자극이며, 초월적-자아-달성이라는 이상적인 목적을 위하여 점진적으로 분투하게 하는 안내자이다.

신앙으로 하는 참된 기도는, 비록 그러한 청원들이 영적인 보답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삶의 기법을 증대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기도는, 심지어 순전히 인간적인 행위인 경우일지라도, 사람의 또 다른 자기와의 대화인데, 인간 마음의 무의식적인 영역 속에 저장되고 보존되는 축적된 인간 본성적 힘들을 실현시키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접근 기법을 조성한다.

기도는 갈등으로부터 회피하는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에 직면하여 자라가게 하는 자극제이다. 가치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위해 기도하지 말며;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만족감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기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덜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더욱 깨닫도록 고안되었으며; 그것은 지식을 증가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통찰력을 넓히도록 고안되었다.

기도가, 영에 의해 쓰였을 때는. 협동을 이루는 영적 진보로 이끌어 준다. 이상적인 기도는 지능적 경배로 이끌어주는 영적 교제의 한 형태이다. 진정으로 기도함은 너희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국 쪽으로 다가가는 진지한 태도이다.

어떤 청원이든지 진지하고 갈망에 찬 반복은, 그러한 기도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진지한 표현이고 신앙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무분별하던지 또는 직접응답이 불가능하던지 상관없이, 그것은 영적 수용력을 위한 혼의 힘을 확대시키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기도는 해를 끼치는 자아분석에 대한 해독제이다.

기도는 자신의 영적 아버지에게 자녀가 보내는 진지하고도 갈망하는 눈빛이며, 그것은 인간의지를 신성한 의지로 서로 바꾸려는 정신과정이다. 기도는 열중하고 있는 것을 마땅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변경하려는 신성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이 글은 본문 [글 91편 3.5] [글 91편 4.2] [글 91편 4.4] [글 91편 6.4] [글 91편 8.13] [글 143편 7.4] [글 144편 2.2] [글 144편 4.2] [글 144편 4.6] [글 144편 4.9] 의 일 부분입니다.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며; 생물학적 진화 속에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회적 진화의 기초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 실재할 것이 확실하다. 결혼은 인류에게 가정(家庭)을 제공하였고, 가정은 길고도 험한 진화적 투쟁 전체의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성격은 단순히 마음이나 도덕보다도 더 큰 그 무엇이다. 성격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회적 관계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적인 결혼생활에서의 서로간의 포옹안에서 애정이 넘치고 그리고 납득하는 친구관계이다. 결혼은, 그 각가지 관계와 함께, 강한 성격을 개발하기에 필수불가결한 보다 높은 동기들과 귀중한 추진력들을 가져오도록 최상으로 설계되어진 것이다.

문명 사회 속에서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가치 있는 것들 거의 대부분은 가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가정은 평화로운 집단을 이루는 데 있어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었는데, 남성과 여성은 자신들의 반목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를 배우면서 동시에 자기 자녀들에게 평화를 추구하도록 가르쳤다.

결혼은 모든 인간적 제도들의 모체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가정의 설립과 유지를 직접적으로 이룩하기 때문이며, 가정은 사회의 구조적인 기초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사람의 가장 순수하게 인간적인 업적인데, 남편과 아내라는 사회적 관계들과 함께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관계들의 진화를 일으키는 것과 결합되어 있다.

이 글은 본문 [글 82편 0.1] [글 160편 2.6] [글 68편 2.8] [글 84편 6.8] 의 일 부분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 하는: 삶의 지평을 넓히고 그의 개인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과학은 사람을 위하여 물질적으로 해야 한다. 참된 과학에서는 참된 종교와 계속되는 대립관계가 있을 수가 없다. "과학적인 방법"은 단지 물질적인 모험들과 물리적인 성취들을 재는 지적 척도이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전적으로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적 실체들과 종교적 경험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혀 쓸모가 없다.

우주 실체에는 바로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있다 ; 사실, 관념, 그리고 관계이다. 종교적인 인식에서는 이 실체들을 과학, 철학, 그리고 진리로 인지한다. 철학은 이 활동들을─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이성, 지혜, 그리고 신앙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물질, 의미, 그리고 가치로 명명하려는 습관이 있다.

과학은 사실을 다룬다; 종교는 오직 가치에만 관여한다. 마음은 활짝 깨우쳐지는 철학을 통하여 사실과 가치, 이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하여 완벽한 실체의 개념에 도달한다. 과학은 지식의 권역이고, 철학은 지혜의 영역이며, 종교는 신앙 경험의 영역임을 기억해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구체화시켜 나타나는 두 가지 위상을 마련해준다:

모든 전자(電子), 생각, 또는 영(靈)의 모든 충동은 전체 우주 속에서의 어떤 행동이다.

이 글은 본문 [글 195편 7.2] [글 196편 3.2] [글 101편 5.2] [글 56편 10.4] 의 일 부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필사사람과 직접적 접촉을 만들며 그리고 그의 안에 살고 거주하도록 그의 무한하고 영원하며 이해할 수 없는 자아의 일부분을 내어주신다. 하느님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모험 여행에 오르셨다. 만일 너희가 너희 안의 그리고 너희 둘레의 영적 기세들의 안내를 따른다면, 너희는 공간의 진화 세계들로부터 상승하는 그의 창조체들의 우주 목표로서, 사랑하는 하느님에 의해 수립된 그 높은 운명을 달성하는데 실패할 수 없다.

우주 아버지의 영이 너희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아 있는 데, 하늘 멀리에서 하느님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비록 너희가 하느님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만일 너희가 내주하는 영의 인도를 따르면,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애 한 생애, 우주에 우주를 거쳐서 그리고 한 시대 한 시대, 너희가 우주 아버지의 낙원 개인성의 현존 앞에 마침내 서게 될 때까지, 틀림없이 인도될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5편 1.12] [글 5편 2.3] [글 2편 5.5] 의 일 부분입니다.



모든 기도의 진지함은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보증이 된다; 모든 탄원의 영적 지혜와 우주적 일관성은 응답의 시기와 방식과 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자신의 우둔하고 미숙한 자녀들의 어리석은 기도들에 대해서 글자 그대로 대답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그러한 터무니없는 탄원을 드리면서 많은 기쁨과 진정한 혼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영적으로 갈망하는 기도를 망설이지 말라; 너의 탄원에 응답 받을 것을 의심하지 마라. 이 응답은 어딘가에 저장될 것이며, 이 세계가 아니면 다른 세계들에서, 그곳에서 네가 그 이전에 오래-기다렸으나 시기가-맞지 않었던 그 탄원을 이제는 네가 인지하고 충분히 해 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그 곳에서, 그 탄원들이 실제적으로 조화우주에서의 어떤 달성을 성취하게되는 그 미래의 영적 차원에 다다르게 하는, 바로 그러한 너의 성취를 그 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말은 기도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영적 탄원의 강물이 어쩌다 흘러갈 수 있는 지적 통로에 불과하다. 기도에서의 말의 가치는 사사로운 헌신 안에서 순전히 자기암시이며 집단적 헌신 안에서 사회적암시에 불과하다. 하느님께서는 그 혼의 태도에 응답하며 그 말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다.

기도는 갈등으로부터 회피하는 기법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에 직면하여 자라나게 하는 자극제이다. 가치를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만족감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이 글은 본문 [글 146편 2.6] [글 168편 4.12] [글 91편 8.12] [글 91편 8.13]의 일 부분입니다.



예수는 물질 창조체에게는 보일 수 없는 당신 자신을, 인간이 볼 수있도록 만들어 주는 인간모습으로 나타난 영적 렌즈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선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그로서 생존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로 구원자이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가슴속에서 사랑에 대한 응답이 깨어날 수 있도록 깨우칠 수 있도록 그토록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셨을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은 매우 확실히 계시되었으므로 아버지로부터 육신으로 온 주(主)는 진실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생명수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모든 세대들의 소망이다.
나는 영원한 구원을 향한 열린 문이다.
나는 끝없는 생명의 실체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무한한 완성을 향한 좁은 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영원한 생존에 이르는 비결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나의 유한한 자녀들에게 무한한 아버지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며 ; 너희는 가지들이다.
나는 살아있는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다.
나는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다리이다.
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살아있는 연결 고리이다.

이 글은 본문 [글 169편 4.13] [글 188편 5.2] [글 182편 1.9]의 일 부분입니다.



우주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이해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우주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리고 개인성으로 관리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들이 인간적이든 초인간적이든, 단지 어떤 다른 마음 현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사람의 개인성이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다면,그 우주는 자체 어딘가에 신성한 마음과 실제적인 개인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실재(實在)하고 계시다는 실제성은, 사람의 필사자 마음 속에서 살며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생존되는 불멸 혼의 진화를 도와주도록 낙원으로부터 보내진 영 감시자의 신성한 현존의 내주를 통하여, 인간의 경험 속에서 명시되어진다.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이 신성한 조절자의 현존은 세 가지 경험적 현상에 따라서 드러내어진다:

하느님의 실재는 과학적 실험이나 논리적 추론의 순수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 하느님은 오직 인간 경험의 영역 안에서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실체에 대한 참 개념은 논리에서 적합한 것이고, 철학에서 타당한 것이며, 종교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그리고 개인성 생존에 대한 그 어떤 소망에서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 글은 본문 [글 1편 6.7] [글 1편 2.3] [글 1편 2.4]의 일 부분입니다.



천사들은 비록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하나의 존재이다; 인간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몸체로 태어나고 또 물질을 근거로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영으로 이루어진 본성과 영으로부터 기원된 존재이다. 생명이 유한한 필사자인 인간에게 그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떤 에너지 변환자나 또는 차원 중개자의 도움 없이도, 육신으로 있는 너희를 지금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이 유한한 필사자인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모습과 형태를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깊숙하게 인지하고 또 납득하고 있으며, 비록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감각작용과는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의 감성과 감정의 그 모든 것을 속속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음악과 예술 그리고 유머에서 너희들의 노력과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잘 알며 또 매우 즐긴다. 그들은 너희들의 도덕적 투쟁과 영적인 어려움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 존재들을 사랑하며, 그리고 오직 선한 것만이 그들을 납득하고 사랑하려는 너희의 노력에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천사 무리들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창조체 중에서 하나의 계층이다; 그들은 너희와 같이 생명이 유한한 창조체들인 물질로 이루어진 계층과 전반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지적 존재로서의 하나의 독특한 무리로서 활동하고 기능하고 있다.

천사들은 하늘 세계에서 일하는 영의 속성을 지니고, 영에 관한 일을 하는 마치 하인과 같은 존재이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이루게 해주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또 모든 것을 다 알려주는 지혜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충성스럽고 지칠 줄 모르는 이들 모든 천사들은 진실로, 참으로,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성결하고 거룩하다.

너희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에 대한 이야기와 가르침은 결코 꾸며내거나 상상의 신화가 아니다; 인간 존재에서도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고유한 개인성을 지키려는 개별 천사들이 실제로 같이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아셨기에, 천국의 자녀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 하였다: "이 어린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겠는데, 너희들의 천사들이 너희와 함께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내 아버지의 영을 항상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는 너희와 너무나도 가까이 있으며 너무나도 다정하게 너희를 돌보기 때문에 너희가 이해하도록 빗대어 말한다면, 그들은 "너희들의 고집스러운 선입관과 편협함과 완강한 고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聖)천사들이 비록 너희처럼 만져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너희처럼 물질로 이루어진 육신의 몸을 가진 것도 아니고, 또한 몸에 날개를 지닌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영으로 이루어진 감정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감정과 나란히 견주어 질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느낌들과 감정이 소용돌이 치는 가슴을 지니면서 너희들의 심정을 체험하며 알고 있다.

성(聖)천사들은 너희를 위해 행동하고 돌보지만, 너희가 직접 호소하는 청원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렇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상급자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너희가 살아가면서 스치는 그 모든 변덕스런 생각에 따라서 행동하거나, 또는 너희의 그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한 기분과는 관계없이 활동하고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너희가 그들이 너희 각자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거나, 또는 너희를 도우려는 그들의 임무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도록 만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너희는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말해 이 말은 천사가 너희들의 호소나 또는 너희들의 기도에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너희의 명령에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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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마음에는 그의 모든 광대한 권역에 속한 모든 창조체를 품 안으로 끌어안는 계획이 있으며, 이 계획은 한없는 기회와 한없는 진보 그리고 끝없는 삶에 들어있는 영원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길 데 없는 생애의 무한한 보물들은 바로 애써서 싸워 나간 것에 따른 너희의 것이다 !

영원의 목표가 앞에 있다! 신성 달성의 모험이 너희 앞에 놓여있다! 완성을 향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길에서의 모든 걸음을, 내주하는 조절자의 안내에 그리고 모든 육체 위에 그토록 자유로이 부어진 우주 아들의 선한 영의 인도에 의지하면서, 믿음과 신뢰의 경주를 달리게 될 모든 인간 존재의 노력에 대하여 틀림없는 승리가 마지막을 장식할 것이다.

이상의 추구─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분투─는 죽음 이전과 이후에 계속되는 노력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필사자 실재의 상태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행하는 선한 모든 것들은 미래의 삶의 증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참된 종교는, 자연적인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결과로서 사람에게 증여되어있는 고귀한 성격의 모든 미덕을 얻는다는 헛된 희망을 북돋아 줌으로서 도덕적 게으름과 영적 나태함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삶에 있어서 필사자가 잠시 빌려 사는 동안에 진보하려고 애쓴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필사자의 소득은 불멸이 되는 생존 경험에서의 그 첫번째 단계의 풍요로움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계속 이어진다─살아 남는다─, 이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우주 기능, 하느님을 찾아내는 과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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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궁금하신 질문도 이 책은 가장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 줄것입니다.
(이 글은 미국 유란시아 독자 사이트인 진리의 책 자료를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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